10화 - #10
'딩동~'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아파트 벨소리가 집안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맥주캔이 족히 십여 개는 넘어 보였다. 술에 취해 뻗어 거실 바닥의 맥주캔들 사이에 널부러져 있는 수호와 세희는 누가 와서 엎어가도 모를 판이었다.
'딩동~'
다시금 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수호가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긁적 거리는 사이, 현관문이 덜커덕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철컥!' 하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중년 남자가 집안에 들어섰다.
그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려다 잠시 멈칫했다. 거실 바닥에서 자고 있는 수호와 세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둘이 앙숙처럼 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는, 수호의 외삼촌인 재현이었다.
그의 손에는 서류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서류봉투를 놓을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는 조금 지저분하긴 해도 그나마 나아 보이는 식탁 위에 툭 던져 놓았다.
"아..."
수호의 신음소리에 재현의 고개가 소리를 따라 돌아갔다. 수호의 오른팔을 세희가 베고 있었다. 아마 그 때문에 팔에 통증이 왔나보다.
수호는 잠든 무의식중에 저린 오른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세희가 온몸으로 누르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
"잘들 논다.... 이게 다, 얼마나 마신 거야?"
재현이 바닥에 뒹구는 맥주 캔들을 살펴보니 족히 열댓 개는 넘어 보였다.
그는 조심스레 수호 머리맡으로 가서 쭈그려 앉은 다음, 수호의 뺨을 톡톡 치며 불렀다.
"야, 임수호, 임수호!"
행여나 세희가 깰까 봐 낮은 목소리로 수호만 깨우려 소리를 죽였다.
인상을 쓰고 고개를 내저으며 저항하던 수호의 눈이 결국 뜨이고 말았다.
실눈을 뜨고 잔뜩 인상을 쓴 체 재현을 올려다보더니,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어? 외삼촌?"
"뭐하냐? 둘이 사귀냐?"
재현의 말에 수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팔을 베고 있는 세희를 보고는, 있는 힘껏 그녀를 밀쳐냈다.
그러더니 "아..."하는 신음 소리를내며 찌릿찌릿한 오른팔을 왼팔로 주물렀다.
"아오... 아파 죽겠네."
수호가 세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자, 재현이 피식 웃었다.
"술은 쟤 혼자 마셨냐?"
"아니.... 자꾸 뎀비잖아요....쪼그만게... 자꾸 날 이길 수 있다면서..."
"그래서 술로 맞짱이라도 뜬 거야?"
수호가 장난스럽게 주먹을 쥐고 가슴을 두번 탕탕치며 대답했다.
"9대 6으로 압승했습니다."
"뭐가 9대 6이야?"
"제가 9캔 마셨습니다."
"잘났다."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호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식사하셨어요?"
"어떤 식사? 아침? 점심?"
"지금이 몇 시예요?"
수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 시계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11시?"
"나가자. 밥 사줄게. 해장해야지."
"아이, 뭐 맥주 9캔 가지고...."
별거 아니란 듯이 웃다가, 돌연 정색하며 말했다.
"해장은 역시 알탕이죠."
"그래. 나가자. 쟤도 깨워봐."
"누구요? 저기 저 쳐 자빠져 자는 저놈이요? 아, 쟤는 해장 필요 없습니다. 그냥 쭉~ 자라고 하죠."
그러자 누워있던 세희가 눈 감은 체 그대로 중얼거렸다.
"다~ 듣고 있습니다. 알탕."
"언제 일어났데?"
수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세희는 획하니 몸을 일으켜 세워 앉고는 수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거칠게 머리를 밀어내는데, 안 일어나고 버틸 수가 있나? 난 또 머리채 잡힌 줄 알았네."
"아~ 머리채를 많이 잡혀 보셨나 봐요? 뭐... 안 좋은 기억? 회상? 뭐 그런 건가?"
"네네, 머리채 무지하게 잡혔습죠."
수호의 비아냥 거림에 세희는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항복의 의미로 두손을 들어올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재현이 세희에게 물었다.
"그래서? 먹을 거야 말 꺼야?"
세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당. 연. 히. 먹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알탕을 마다하다뇨?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세희의 태도에 재현이 피식 웃더니, 수호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어째... 너희 둘이 좀... 비슷하다?"
그러자 세희와 수호가 동시에 얼굴을 구기며 재현을 쏘아보며 외쳤다.
"예~에!? 아니거든요!"
***
세 사람이 마주 앉은 은색 테이블 그 한가운데 큼지막한 냄비속 알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활기찬 표정으로 인사하는 세희를 보며 재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6캔 마셨다며? 멀쩡하네?"
세희는 수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7캔이거든요?"
수호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았다.
"6캔 맞거든. 내가 다 샜거든."
"중간에 하나 건너뛰셨나 보죠."
"마지막에 다 먹지도 못했잖아."
"와~ 한 모금 남겼거든요?"
"맥주캔을 세 모금 만에 드시나 봐요?"
꽁냥대는 둘을 보다 못한 재현이 숟가락으로 식탁을 탁탁 치며 소리쳤다.
"야야, 시끄러. 그냥 먹어."
입술을 한번 삐죽인 세희는 배고픔에 국자로 국물 한가득 떠서 자신의 앞접시에 듬뿍 따랐다. 이내 얼른 한수저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지하는 수호로 인해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못먹게 막는 수호의 돌발행동에 세희는 뭐야?또? 하는 경계의 눈빛으로 수호를 향해 눈을 치떴다.
"뜨겁다."
세희는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리며 수호를 쳐다보다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호호 불어서 먹을 거거든요?"
수호가 손을 치우자, 세희가 호호 불고 입에 넣더니 금세 인상을 썼다.
얼른 찬물을 들이켜는 모습에 수호가 혀를 끌끌 찼다.
"거봐 뜨겁다니까."
"아... 왜 이렇게 뜨거워요?"
"보면 몰라?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타박하는 수호의 얄미운 말투에 약오른 세희가 수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세희를 쳐다보는 눈빛에 희미한 걱정이 깔려있다는걸 몰랐다. 딴짓하듯 얼른 시선을 피한 수호는 자신도 한 국자 가득 떠 앞접시에 따랐다.
"먹으면서 들어."
재현이 말을 하자, 두 사람은 한수저씩 떠서 입에 넣으며 재현을 쳐다보았다.
"난 항시 그들을 주시해왔어. 지금까지 그들의 행보에 의심스러운 정황은 많았지만, 이렇다 할 증거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지. 그래도 정황은 계속 주시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대략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측은 가능했어."
재현의 말에 수호가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과거형이네요?"
재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뭔가 달라졌어."
"뭐가요?"
"정확한 건 나도 몰라. 저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달까? 본적 없는 외부인들의 출입이 잦아지고 있어."
수호는 뭔가 생각난 듯 세희를 돌아보았고, 세희도 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기억나는 바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제 존재를 눈치챈 거 같아요."
세희의 말에 재현이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눈치채다니? 어떤 의미지?"
"제가 모시는 신께서, 저들의 행위에 대해 경고하셨어요. 그건 저들이 하고 있는 그 어떤 주술적 행위에, 신의 개입이 발생했다는 걸 의미하죠. 어떤 형태로든 저들에게 변화가 왔을 것이고, 그건 계획의 변경을 이야기하죠."
이어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들이 세희를 찾아 나설 모양이에요."
그러자 세희가 가게 한쪽 벽에 놓인 오래된 TV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찾고 있어요."
자연스레 재현과 수호의 시선이 TV 쪽으로 향했다. TV에서는 전날 저녁 개들에게 물어뜯겨 죽은 한 성남동 무당의 이야기를 뉴스속보로 내보내고 있었다.
"저게 저들 짓이란 거냐?"
재현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묻는 말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큰 신을 모실만한 그릇을 가진 무당들을 죄다 잡아 죽일 생각인가 봐요. 어떤 형태로든 저렇게 나오면, 제가 계속 모습을 숨기기 힘들 테니깐요."
옆에서 수호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직접 찾아서 죽이든, 아니면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든 하겠다?"
이어 재현이 다시 TV 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죽일 수 있는 거지? 동물들을 부린 건가? 통제가 가능해?"
세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교적 수월한 편이죠. 마모의 술수를 부렸을 수도 있구요."
"마모의 술수?"
"네. 마모는 동물들을 부리는 능력을 가진 신이에요. 마모의 힘을 빌리면 동물들을 부려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동물을 부릴 수 있는 신은 마모 말고도 많이 있죠."
"그러니까 네 말은... 저들이 어떤 주술적 행위를 통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거지?"
"예. 맞아요."
"그래서는... 설령 그게 사실이라도 저들을 잡아넣을 방법은 없어."
"어차피 애초에 법적 처벌을 기대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수호가 재현을 보며 말했다.
"신의 경고가 있었어요. 열두 사도란 것들이 세희의 목숨을 노릴 거라고 했어요."
수호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졌다.
"어차피 저들이 우릴 찾지 않아도 우리가 저들을 찾아야 했을 테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죠."
태연한 세희의 말에, 재현은 절로 피식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배짱 좋구나? 널 죽이러 온다는데."
"뭐 인생 별거 있나요? 하는데 까지 해보고 죽으면 별 수 없는 거죠."
죽음에 초연한 듯, 세희는 가볍게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새로 국물 한국자 떠 앞접시에 담고는 수저 가득담아 입으로 가져갔다 .
"아, 뜨..."
또다시 입을 데인 듯 놀라는 세희를 보며 수호가 중얼거렸다.
"죽음은 감당해도, 뜨거운 건 감당 못하나 봐?"
세희가 그런 수호를 흘깃 째려보자, 수호는 얼른 시선을 피해 한수저 입에 넣으며 딴청을 피웠다.
"음~~ 좋아, 좋아. 아~ 그냥 속이 확 풀리네."
***
그는 어쩐지 그와 꽤나 잘 어울리는 팔자걸음으로 들어와서는, 대뜸 친한 척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 써놔~"
그의 아는 척하는 모습에 이선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촌스러운 성격은 어떻게 된 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는 동그란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엔 기름으로 떡칠을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그는 이선화 앞으로 걸어와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선화는 내밀어진 손은 거들떠도 안본체 "왔어?" 한마디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그 남자는 머쓱해진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도도한 매력이 있어~"
이선화가 앉아 있는 자리 맡은편으로 걸어가 아무렇지 않은듯 자연스럽게 마주 앉았다, 이선화는 그의 앞에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내 던졌다.
"뭐야?"
그가 의아해 하자, 이선화가 말했다.
"백사장, 부를 일이란 게 뭐 별거 있겠어?"
백사장은 이선화가 던진 서류봉투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 김 대표도 요즘은 직접 일하는 거 같더만, 어쩐 일 이래?"
테이블 위에 있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던 이선화는 손을 내리고 다리를 꼬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우리 쪽 애들은 지금 바빠. 선거가 이제 1년밖에 안 남아서..."
"아, 그렇지. 큰 작업 하신다고~"
백사장이 히죽거리며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서류를 꺼냈다.
"어디~ 보자~"
흥겹기라도 하는 듯, 흥얼거리며 서류를 하나씩 넘겨보던 백사장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이거... 뭐야?"
백사장이 선글라스를 벗고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선화를 노려보며 물었다.
"장난해?"
"장난 아닌데?"
백사장은 어이없어하며 코웃음을 쳤다.
"누굴 이 바닥에서 몰아낼 생각인 거야 뭐야? 이 사람들이 다 누군지 알면서?"
"알아. 이참에 이 판도 한번 물갈이할 때 됐잖아? 백사장 쪽 사람들이면, 충분하지 않아? 어차피 우리 빠지고, 백동계(白冬界)쪽 애들 빠지면, 남는 건 피라미들이잖아."
백사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피라미? 장난해? 여기 적힌 무당들 중에 내가 모르는 무당이 없을 정도야. 그들이 피라미라는 거야?"
"처리만 해줘. 돈은 달란 대로 줄테니까."
"하~"
백사장이 콧방귀를 뀌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이선화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여, 내뱉는 이선화를 향해 백사장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뭐야? 말해봐. 갑자기 이들을 왜 다 제거하겠다는 거야?"
"왜긴... 몰라서 물어? 우리 하는 일이 큰일 이잖아. 큰일이 있기 전에, 큰 싹은 정리하겠다는 거지."
"하~"
백사장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왜? 싫어? 백동계로 갈까?"
이선화의 협박에, 백사장은 대답 없이 이선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오른손 검지로 이선화를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거... 장난질 치는 거면 재미없어. 김 대표, 요즘 좀 잘 나가는 모양인데.... 나 백사장이야. 이 바닥에서 내 눈밖에 나서 온전히 걸어 다니는 인간 없어."
"알아.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 아냐? 할 거야 말 거야?"
백사장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다발이나 준비해놔. 이거 싼 거 하나도 없다."
"걱정 마, 알잖아. 김 대표, 딴 건 몰라도 돈 하나는 확실해."
백사장이 히죽거리듯 웃으며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한 번에 움직일 거야. 순서는 없어."
그의 말에 이선화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끝나고 보자. 술 한잔 사."
백사장은 그 말을 남기고는 홱하니 몸을돌려 왔던 길을 따라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선화는 불안한 듯 긴장된 표정으로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아파트 벨소리가 집안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는 맥주캔이 족히 십여 개는 넘어 보였다. 술에 취해 뻗어 거실 바닥의 맥주캔들 사이에 널부러져 있는 수호와 세희는 누가 와서 엎어가도 모를 판이었다.
'딩동~'
다시금 벨소리가 울려 퍼지고,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수호가 목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긁적 거리는 사이, 현관문이 덜커덕거리기 시작했다.
이내 '철컥!' 하는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한 중년 남자가 집안에 들어섰다.
그는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려다 잠시 멈칫했다. 거실 바닥에서 자고 있는 수호와 세희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둘이 앙숙처럼 굴더니..."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는, 수호의 외삼촌인 재현이었다.
그의 손에는 서류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 서류봉투를 놓을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는 조금 지저분하긴 해도 그나마 나아 보이는 식탁 위에 툭 던져 놓았다.
"아..."
수호의 신음소리에 재현의 고개가 소리를 따라 돌아갔다. 수호의 오른팔을 세희가 베고 있었다. 아마 그 때문에 팔에 통증이 왔나보다.
수호는 잠든 무의식중에 저린 오른팔을 뿌리치려 했지만 세희가 온몸으로 누르고 있어 꼼짝할 수 없었다.
"잘들 논다.... 이게 다, 얼마나 마신 거야?"
재현이 바닥에 뒹구는 맥주 캔들을 살펴보니 족히 열댓 개는 넘어 보였다.
그는 조심스레 수호 머리맡으로 가서 쭈그려 앉은 다음, 수호의 뺨을 톡톡 치며 불렀다.
"야, 임수호, 임수호!"
행여나 세희가 깰까 봐 낮은 목소리로 수호만 깨우려 소리를 죽였다.
인상을 쓰고 고개를 내저으며 저항하던 수호의 눈이 결국 뜨이고 말았다.
실눈을 뜨고 잔뜩 인상을 쓴 체 재현을 올려다보더니, 조금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어? 외삼촌?"
"뭐하냐? 둘이 사귀냐?"
재현의 말에 수호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팔을 베고 있는 세희를 보고는, 있는 힘껏 그녀를 밀쳐냈다.
그러더니 "아..."하는 신음 소리를내며 찌릿찌릿한 오른팔을 왼팔로 주물렀다.
"아오... 아파 죽겠네."
수호가 세희를 원망스럽게 노려보자, 재현이 피식 웃었다.
"술은 쟤 혼자 마셨냐?"
"아니.... 자꾸 뎀비잖아요....쪼그만게... 자꾸 날 이길 수 있다면서..."
"그래서 술로 맞짱이라도 뜬 거야?"
수호가 장난스럽게 주먹을 쥐고 가슴을 두번 탕탕치며 대답했다.
"9대 6으로 압승했습니다."
"뭐가 9대 6이야?"
"제가 9캔 마셨습니다."
"잘났다."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호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식사하셨어요?"
"어떤 식사? 아침? 점심?"
"지금이 몇 시예요?"
수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 시계를 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11시?"
"나가자. 밥 사줄게. 해장해야지."
"아이, 뭐 맥주 9캔 가지고...."
별거 아니란 듯이 웃다가, 돌연 정색하며 말했다.
"해장은 역시 알탕이죠."
"그래. 나가자. 쟤도 깨워봐."
"누구요? 저기 저 쳐 자빠져 자는 저놈이요? 아, 쟤는 해장 필요 없습니다. 그냥 쭉~ 자라고 하죠."
그러자 누워있던 세희가 눈 감은 체 그대로 중얼거렸다.
"다~ 듣고 있습니다. 알탕."
"언제 일어났데?"
수호의 퉁명스러운 말투에, 세희는 획하니 몸을 일으켜 세워 앉고는 수호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거칠게 머리를 밀어내는데, 안 일어나고 버틸 수가 있나? 난 또 머리채 잡힌 줄 알았네."
"아~ 머리채를 많이 잡혀 보셨나 봐요? 뭐... 안 좋은 기억? 회상? 뭐 그런 건가?"
"네네, 머리채 무지하게 잡혔습죠."
수호의 비아냥 거림에 세희는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항복의 의미로 두손을 들어올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재현이 세희에게 물었다.
"그래서? 먹을 거야 말 꺼야?"
세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당. 연. 히. 먹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알탕을 마다하다뇨?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세희의 태도에 재현이 피식 웃더니, 수호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어째... 너희 둘이 좀... 비슷하다?"
그러자 세희와 수호가 동시에 얼굴을 구기며 재현을 쏘아보며 외쳤다.
"예~에!? 아니거든요!"
***
세 사람이 마주 앉은 은색 테이블 그 한가운데 큼지막한 냄비속 알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활기찬 표정으로 인사하는 세희를 보며 재현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6캔 마셨다며? 멀쩡하네?"
세희는 수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7캔이거든요?"
수호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았다.
"6캔 맞거든. 내가 다 샜거든."
"중간에 하나 건너뛰셨나 보죠."
"마지막에 다 먹지도 못했잖아."
"와~ 한 모금 남겼거든요?"
"맥주캔을 세 모금 만에 드시나 봐요?"
꽁냥대는 둘을 보다 못한 재현이 숟가락으로 식탁을 탁탁 치며 소리쳤다.
"야야, 시끄러. 그냥 먹어."
입술을 한번 삐죽인 세희는 배고픔에 국자로 국물 한가득 떠서 자신의 앞접시에 듬뿍 따랐다. 이내 얼른 한수저 입으로 가져가려는 찰나 그녀의 손을 붙잡아 제지하는 수호로 인해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못먹게 막는 수호의 돌발행동에 세희는 뭐야?또? 하는 경계의 눈빛으로 수호를 향해 눈을 치떴다.
"뜨겁다."
세희는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리며 수호를 쳐다보다가 새초롬하게 말했다.
"호호 불어서 먹을 거거든요?"
수호가 손을 치우자, 세희가 호호 불고 입에 넣더니 금세 인상을 썼다.
얼른 찬물을 들이켜는 모습에 수호가 혀를 끌끌 찼다.
"거봐 뜨겁다니까."
"아... 왜 이렇게 뜨거워요?"
"보면 몰라?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타박하는 수호의 얄미운 말투에 약오른 세희가 수호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세희를 쳐다보는 눈빛에 희미한 걱정이 깔려있다는걸 몰랐다. 딴짓하듯 얼른 시선을 피한 수호는 자신도 한 국자 가득 떠 앞접시에 따랐다.
"먹으면서 들어."
재현이 말을 하자, 두 사람은 한수저씩 떠서 입에 넣으며 재현을 쳐다보았다.
"난 항시 그들을 주시해왔어. 지금까지 그들의 행보에 의심스러운 정황은 많았지만, 이렇다 할 증거 같은 건 남아있지 않았지. 그래도 정황은 계속 주시해 왔기 때문에, 그들이 대략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측은 가능했어."
재현의 말에 수호가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과거형이네요?"
재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갑자기 뭔가 달라졌어."
"뭐가요?"
"정확한 건 나도 몰라. 저들이 갑자기 분주해졌달까? 본적 없는 외부인들의 출입이 잦아지고 있어."
수호는 뭔가 생각난 듯 세희를 돌아보았고, 세희도 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기억나는 바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들이 제 존재를 눈치챈 거 같아요."
세희의 말에 재현이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눈치채다니? 어떤 의미지?"
"제가 모시는 신께서, 저들의 행위에 대해 경고하셨어요. 그건 저들이 하고 있는 그 어떤 주술적 행위에, 신의 개입이 발생했다는 걸 의미하죠. 어떤 형태로든 저들에게 변화가 왔을 것이고, 그건 계획의 변경을 이야기하죠."
이어 수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마도 그들이 세희를 찾아 나설 모양이에요."
그러자 세희가 가게 한쪽 벽에 놓인 오래된 TV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찾고 있어요."
자연스레 재현과 수호의 시선이 TV 쪽으로 향했다. TV에서는 전날 저녁 개들에게 물어뜯겨 죽은 한 성남동 무당의 이야기를 뉴스속보로 내보내고 있었다.
"저게 저들 짓이란 거냐?"
재현이 의심스럽다는 투로 묻는 말에 세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큰 신을 모실만한 그릇을 가진 무당들을 죄다 잡아 죽일 생각인가 봐요. 어떤 형태로든 저렇게 나오면, 제가 계속 모습을 숨기기 힘들 테니깐요."
옆에서 수호가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직접 찾아서 죽이든, 아니면 억울한 사람들의 죽음을 보면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든 하겠다?"
이어 재현이 다시 TV 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죽일 수 있는 거지? 동물들을 부린 건가? 통제가 가능해?"
세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비교적 수월한 편이죠. 마모의 술수를 부렸을 수도 있구요."
"마모의 술수?"
"네. 마모는 동물들을 부리는 능력을 가진 신이에요. 마모의 힘을 빌리면 동물들을 부려 능히 사람을 죽일 수 있어요. 동물을 부릴 수 있는 신은 마모 말고도 많이 있죠."
"그러니까 네 말은... 저들이 어떤 주술적 행위를 통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거지?"
"예. 맞아요."
"그래서는... 설령 그게 사실이라도 저들을 잡아넣을 방법은 없어."
"어차피 애초에 법적 처벌을 기대할 수 있는 상대들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수호가 재현을 보며 말했다.
"신의 경고가 있었어요. 열두 사도란 것들이 세희의 목숨을 노릴 거라고 했어요."
수호는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졌다.
"어차피 저들이 우릴 찾지 않아도 우리가 저들을 찾아야 했을 테니, 좋은 쪽으로 생각하죠."
태연한 세희의 말에, 재현은 절로 피식한 웃음이 튀어나왔다.
"배짱 좋구나? 널 죽이러 온다는데."
"뭐 인생 별거 있나요? 하는데 까지 해보고 죽으면 별 수 없는 거죠."
죽음에 초연한 듯, 세희는 가볍게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는 새로 국물 한국자 떠 앞접시에 담고는 수저 가득담아 입으로 가져갔다 .
"아, 뜨..."
또다시 입을 데인 듯 놀라는 세희를 보며 수호가 중얼거렸다.
"죽음은 감당해도, 뜨거운 건 감당 못하나 봐?"
세희가 그런 수호를 흘깃 째려보자, 수호는 얼른 시선을 피해 한수저 입에 넣으며 딴청을 피웠다.
"음~~ 좋아, 좋아. 아~ 그냥 속이 확 풀리네."
***
그는 어쩐지 그와 꽤나 잘 어울리는 팔자걸음으로 들어와서는, 대뜸 친한 척 손을 흔들어 보였다.
"여~ 써놔~"
그의 아는 척하는 모습에 이선화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촌스러운 성격은 어떻게 된 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다.
어울리지 않는 동그란 선글라스를 쓰고, 머리엔 기름으로 떡칠을해 촌스러운 헤어스타일을 한 그는 이선화 앞으로 걸어와 대뜸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선화는 내밀어진 손은 거들떠도 안본체 "왔어?" 한마디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도도하게 걸어갔다. 그 남자는 머쓱해진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한번 쓸어 넘기며 말했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도도한 매력이 있어~"
이선화가 앉아 있는 자리 맡은편으로 걸어가 아무렇지 않은듯 자연스럽게 마주 앉았다, 이선화는 그의 앞에 서류 봉투 하나를 툭 내 던졌다.
"뭐야?"
그가 의아해 하자, 이선화가 말했다.
"백사장, 부를 일이란 게 뭐 별거 있겠어?"
백사장은 이선화가 던진 서류봉투를 천천히 들어 올리며 물었다.
"아, 김 대표도 요즘은 직접 일하는 거 같더만, 어쩐 일 이래?"
테이블 위에 있던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어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으로 가져가던 이선화는 손을 내리고 다리를 꼬며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우리 쪽 애들은 지금 바빠. 선거가 이제 1년밖에 안 남아서..."
"아, 그렇지. 큰 작업 하신다고~"
백사장이 히죽거리며 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서류를 꺼냈다.
"어디~ 보자~"
흥겹기라도 하는 듯, 흥얼거리며 서류를 하나씩 넘겨보던 백사장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이거... 뭐야?"
백사장이 선글라스를 벗고는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선화를 노려보며 물었다.
"장난해?"
"장난 아닌데?"
백사장은 어이없어하며 코웃음을 쳤다.
"누굴 이 바닥에서 몰아낼 생각인 거야 뭐야? 이 사람들이 다 누군지 알면서?"
"알아. 이참에 이 판도 한번 물갈이할 때 됐잖아? 백사장 쪽 사람들이면, 충분하지 않아? 어차피 우리 빠지고, 백동계(白冬界)쪽 애들 빠지면, 남는 건 피라미들이잖아."
백사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피라미? 장난해? 여기 적힌 무당들 중에 내가 모르는 무당이 없을 정도야. 그들이 피라미라는 거야?"
"처리만 해줘. 돈은 달란 대로 줄테니까."
"하~"
백사장이 콧방귀를 뀌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이선화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들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한 모금을 빨아들여, 내뱉는 이선화를 향해 백사장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물었다.
"뭐야? 말해봐. 갑자기 이들을 왜 다 제거하겠다는 거야?"
"왜긴... 몰라서 물어? 우리 하는 일이 큰일 이잖아. 큰일이 있기 전에, 큰 싹은 정리하겠다는 거지."
"하~"
백사장이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왜? 싫어? 백동계로 갈까?"
이선화의 협박에, 백사장은 대답 없이 이선화를 빤히 바라보다가 오른손 검지로 이선화를 가리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거... 장난질 치는 거면 재미없어. 김 대표, 요즘 좀 잘 나가는 모양인데.... 나 백사장이야. 이 바닥에서 내 눈밖에 나서 온전히 걸어 다니는 인간 없어."
"알아.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 아냐? 할 거야 말 거야?"
백사장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다발이나 준비해놔. 이거 싼 거 하나도 없다."
"걱정 마, 알잖아. 김 대표, 딴 건 몰라도 돈 하나는 확실해."
백사장이 히죽거리듯 웃으며 다시 선글라스를 썼다.
"한 번에 움직일 거야. 순서는 없어."
그의 말에 이선화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끝나고 보자. 술 한잔 사."
백사장은 그 말을 남기고는 홱하니 몸을돌려 왔던 길을 따라 걸어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선화는 불안한 듯 긴장된 표정으로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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