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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린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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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연랑
· 최초 등록: 2025.10.04 · 최근 연재: 2025-10-25
읽기 시간 예측: 약 10.53분

50화 - #19


너무 놀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나래가 말끝을 흐리자, 그는 시선을 멀리 두며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가 멈춰 서자, 나래 역시 그의 곁에 멈춰 섰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현우는... 잠깐이지만 나와 같이 산적이 있어. 현준이나 현서는 엄마 곁에 남겠다고 했지만, 현우는 나를 따라가겠다고 했었지."

나래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아빠란 사람이 아이를 인질로 잡고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요?"

나래의 말에, 그가 나래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너희를 협박한 건 내가 아니야. 그건... 현우 안에 내재된 증오심 덩어리야. 나는 그 증오심 한가운데 갇혀 있을 뿐이고."

"그럼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죠? 그 증오심은 제게 뭘 바라는 거죠?"

"너에게서 약점을 찾으려 하겠지. 나를 내보내서 너의 약한 면을 보려 할 거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래는 뭔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다가 나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여기에 아이들의 아빠가 있을 리 없어.'

나래는 그렇게 생각하자, 소름이 돋는 동시에 상황을 다시 한번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고, 아빠라는 사람을 응시한 나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거짓을 말한 건 아니군요. 다만..."

그의 표정이 의아함으로 물들자, 나래가 말을 이었다.

"당신 자체가 거짓이에요."

이번엔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나래는 자신의 그림자와 대화를 나누던 때를 떠올리며, 지금의 상황을 투영시키자 그에 대해 이해되는 것이 있었다.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감싸며 마음속으로 백하도령을 부르자, 바깥쪽에서 지금의 상황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백하도령이 성큼성큼 나래 쪽으로 걸어갔다.

검은 기류에 휩싸여있는 나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백하도령이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래야. 내 힘이 느껴지느냐?'

그의 마음속 외침이 나래의 마음속에 울려 퍼졌다.

'여왕에게서... 진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나래의 대답에, 백하도령은 뒤쪽에 서 있는 여왕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리 다가오세요."

백하도령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여왕이 백하도령 앞으로 걸어갔다.

"잠깐이면 됩니다."

백하도령이 예의 온화한 표정과 어조로 말하며, 여왕의 어깨에 손을 얹자, 여왕에게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와 백하도령의 몸을 타고 나래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환상 속에 있던 나래는 순간 주위 풍경이 모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방금 전 보았던, 아이들의 아빠와 똑같은 모습이지만, 그 눈빛과 표정은 사뭇 달랐다.

온화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무심하고 굳은 표정으로 사나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날 따라온다잖아."

짧은 한마디 말이지만, 그 말은 차디차게 들려왔다.

맞은편에는 여왕이 있었다.

"당신... 현우 도시락 하나 제대로 싸줄 수 있겠어요? 현우가 누구랑 친한지는 알아요? 현우 친구 이름이 뭔지는 알아요?"

"그딴 거 안다고 애가 똑바로 클 거 같아?"

"그것조차 모르면서 애가 똑바로 클 거 같아요?"

"현준이하고 현서나 신경 써."

그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의 손을 붙잡고 떠나가는 현우는 몇 번이고 여왕을 돌아보았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망설임, 불안감이 현우의 눈에 맺혀 있는 것 같았지만 여왕은 그저 눈물을 흘리며 바라볼 뿐이었다.

주위 풍경이 마치 영상을 10배속 이상 재생시킨 것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동안, 여왕만은 느릿하게 슬퍼하며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오자 비로소 주위 풍경이 원래의 시간대로 흘러갔다.

"현우... 어머님 되시죠?"

그녀는 학교 선생님인 듯 여왕을 찾아와서 무슨 말인가를 건네었고, 여왕은 부랴부랴 어딘가로 향했다.

그녀가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집 문을 따서 들어가 보니, 안에는 현우가 쓰러져 있었다.

"현우야!"

현우를 안고 급히 병원으로 향한 여왕은, 현우가 영양실조라는 말에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다시 문을 따고 들어갔던 그 집으로 돌아온 여왕은, 텅 빈 냉장고와 청소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는 집안을 보면서 처참하고 비참한 심정을 느꼈다.

'여왕님...'

나래는 그런 여왕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주위 풍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칠흑 같은 어둠만이 가득했고, 울고 있는 여왕과 이를 지켜보는 나래만 남았다.

뒤이어 누군가 나래 옆으로 다가와 섰다.

나래가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에게 먼저 나타났던 온화한 표정의 현우 아빠가 서 있었다.

"왜 그랬죠?"

나래의 물음에 현우 아빠는 대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죠. 당신은 진짜 아빠가 아니니까."

나래는 깨달았다. 그의 정체를.

현서, 현준, 그리고 현우까지 모두 아이들의 영혼도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여왕이 스스로 만들어낸, 그녀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존재들이었다.

"당신은..."

나래는 왠지 마음이 아팠다.

왼쪽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촉감이 느꼈다.

"여왕이... 그토록 바라고 바랬던... 자상한 아빠의 모습이네요."

현우 아빠 역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들 모두가 여왕이란 걸.

한동안 떨어져 지냈던 현우가 아빠와 함께 했었을 그 시간이 아이에게 깊은 상처가 됐을 거라고.

자신을 아빠와 함께 떠나보냈던 엄마에 대한 원망이 있을 거라고.

여왕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아빠이길 바라셨군요. 커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인생의 선배로서 조언도 해줄 수 있는... 그런 아빠이기를..."

현우 아빠의 모습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며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 버렸다.

홀로 남은 여왕은 계속 흐느껴 울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래를 바라보며 말했다.

"평범한... 평범한 아빠이길 바랬어요."

그녀의 대답에, 나래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도 아빠니까... 자기 아들이니까... 설마..."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여왕을 보면서, 나래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아이들 모두 잘 컸잖아요. 이제 다 잊었을 거예요. 어느 누구도... 힘들게 자신들을 키워준 엄마를 원망 할리 없어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여왕의 몸이 점점 작아지더니, 어느새 자그마한 인형만큼 작아져 버렸다.

나래는 조심스럽게 그 인형만 해진 여왕을 양손바닥 위에 올려 잠시 바라보다가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이제 오해하지 마세요. 나쁜 기억은.... 다 잊어요. 현우가 엄마를 미워할 리 없어요."

나래가 온몸에 힘을 주며, 나쁜 기억을 부정하는 그 순간, 주위의 검은 형체가 산산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끼아악...."

검은 늑대는 짧은 비명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나래는 눈을 떠 정면을 응시했다.

웅크리고 있는 검은 형체의 아이를 보면서, 나래는 조심조심 그 아이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나래의 뒤를 쫓아온 여왕이 나래 옆에서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네었다.

"현우야..."

아이가 고개를 들어 여왕을 바라보는 순간, 아이는 검은 형상을 지우며 온전한 아이의 모습이 되었다.

"엄마..."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여왕에게로 달려들어 안겼다.

여왕 품에 안긴 아이가 울며 물었다.

"왜 이제 왔어?"

아이의 투정에, 여왕이 울며 대답했다.

"미안해... 미안해, 현우야.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여왕의 품에 쏙 안긴 현우는 울며 투정을 부리다가, 이내 환한 한 덩어리의 빛으로 변했다.

이어 허공 위를 날아올라, 현서, 현준처럼 여왕의 얼굴 옆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이어 세 개의 빛덩어리들이 모두 다 함께 여왕의 주위를 맴돌다가 여왕의 몸안으로 스며들어가자, 여왕의 몸이 환한 빛을 내더니, 이내 원래 여왕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다시 할머니의 모습이 된 여왕의 표정은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런 여왕에게 백하도령이 다가와 말을 건네었다.

"원한다면... 아이들과 함께 영원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겠습니다."

백하도령의 제안에, 여왕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아이들은... 진짜 내 아이들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허상이겠죠."

나래는 그런 여왕에게 설득하듯 말했다.

"행복했던 순간에 머물 수 있어요."

여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순간에 머물러 있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지. 미우니 고우니 해도, 내 새끼 옆에 있어야지."

나래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주먹을 꽉 쥐며 망설이고 갈등하더니, 이윽코 입을 열었다.

"여왕님은..."

다시 망설이기를 반복하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나래의 말에 여왕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이내 수긍하듯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백하도령이 여왕의 어깨에 손을 대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여왕은 무언가 새로운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누비야?"

여왕이 누비를 찾자, 뒤쪽에 있던 누비가 꼬리를 흔들며 얼른 다가왔다.

"누비야. 누비야..."

여왕이 누비를 껴안고 반가워하자, 누비가 연신 그녀를 핥아대며 꼬리를 흔들어 댔다. 기뻐하는 누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 모습을 보며 서 있던 한울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럼 이제... 여왕의 통치는 끝난 건가?"

한울 옆에 서 있던 이든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마도."

그러더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동안 이곳에 와 있는 그 많은 버림받은 영혼들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이든의 말에 한울이 시선을 떨구었다.

자신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는 죄책감에, 이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그때 나래가 뭔가 생각이 난 듯, 이든과 한울을 보며 말했다.

"어쩌면...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

이든과 한울이 그녀를 바라보며 의아해 하자, 나래가 말을 이었다.

"그들은 버림받았지만, 사람을 그리워하는 영혼들이니까... 사람 곁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던... 사람과 함께 했던 이들이니까... 꿈토끼들이 더 이상 가까이 갈 수 없게 된 사람들의 꿈에 대해서 잘 알지 않을까?"

나래의 말에 이든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래... 맞아... 우리가 꼭 사람들 곁에서 그들의 꿈을 볼 필요는 없어. 우리가 꼭... 꿈을 배달할 필요 없지."

한울이 이든을 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엔 이든이 한울을 보며 대답했다.

"어쩌면... 꿈공장을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들이 돕는다면 말이야."

이든의 밝아진 표정을 보면서, 한울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듯 어리둥절해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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