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 #3
이런 동굴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동굴이었다. 더 놀라운것은 이 커다란 동굴의 입구를 너무도 잘 은폐해놔서 언듯 봐서는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동굴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먹이는 노모나, 누워있는 병자를 돌보는 모습 등, 예상외의 풍경에 연희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저는 죄다 무시무시한 사람들만 모여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의외라는듯한 연희의 말투에 주동환이 그들을 한번 쭉 돌아보며 대답했다.
"대뜸 율교를 믿으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 말해서 믿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아픈 가족을 돌봐주어, 그들의 마음을 먼저 얻고, 그리고 천천히 율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면,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지."
연희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연희를 달래고 싶은 마음에, 주동환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모든 것이 정리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토록 바래 마지않는 세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권력을 쥐고, 용상에 오를 것이다."
연희는 의심의 눈길로 주동환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이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다, 아는 수가 있다."
주동환이 성큼성큼 걸어가버리자, 연희도 서둘러 뒤따라 걸었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동환을 보면 깍듯이 인사를 했다.
거친 사내들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존경 어린 표정으로 주동환을 바라보았다.
문득 연희가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저들은 마치... 율교가 아니라, 나리를 따르는 것 같습니다."
주동환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들은 율교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율교를 따르는 이들은 지금 이안에 없다. 이들은... 율교를 따르는 이들이, 율교를 따르도록 만든, 밑거름이 된 사람들이다."
연희는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나마 무슨말인지 조금은 알것같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덧 두 사람은 제일 깊숙한 안쪽까지 다다랐다.
그곳에는 제법 깨끗해 보이는 천막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 이르자 주동환이 연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이곳에 머물거라."
연희는 다른 곳보다도 깨끗한 천막 상태에, 어느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은 나리가 머물던 곳 아닙니까?"
연희가 대번에 알아보자 주동환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 바로 옆에 새로 하나 설치할 것이니. 염려치 말고 이곳에서 쉬거라. 그리고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이야기하거라."
연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떠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 해야할지 스스로 깨달을때까지는, 나리 곁에 있겠습니다."
연희의 대답에 주동환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주동환이 발걸음을 옮겨 왔던 길로 되돌아 가려 하자, 등뒤에서 연희의 물음이 들렸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주동환이 멈칫하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물어보거라."
"나리와 저는.... 어찌 알게 된 것입니까?"
주동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연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죽어, 원혼이 되어 떠돌 때, 나는 이미 이 몸에 깃든 기생령이었다. 이 몸에 적응하고 있던 때였지. 떠돌던 네가 그 몸에 깃들 때,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주동환의 눈빛에 연희는, 무언가 더 물어보려다가 멈추었다.
어쩐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고, 물어보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희는, 다른 것을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제가 나리의... 연인...이었습니까?"
연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주동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이리도 너를 그리워할 줄 알았다면 말이다. 나는 분명 연심을 가졌었다. 나 자신도 몰랐을 뿐.... 너는.... 네게는 아마도... 그저 오라버니였겠지."
연희는 주동환의 말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일말의 의심이 해소되자 조금쯤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연인이었다면, 꽤나 혼란스럽고 죄스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주동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세자의... 어떤 부분이 그리도... 좋더냐?"
망설이듯 물어보는 주동환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연희는, 저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연희의 웃음을 보자, 주동환은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냥 좋습니다. 그러는 나리는... 제가 어찌 좋습니까? 어디가 그렇게 좋습니까?"
웃으며 말하는 연희를 보며, 주동환 역시 편안한 웃음을 마주 지어주었다.
"그냥... 좋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오누이같이 다정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쉬거라. 먹을 것을 좀 챙겨 오마."
"예, 나리."
주동환이 어딘가로 걸어가고, 연희는 천막 안에 들어가 오랫동안 걸어 고단한 몸을 내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먼길을 돌아 고향의 집에 돌아온 듯, 알게 모르게 불안했던 그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자의 곁을 떠나왔다는 쓸쓸함이 지워지지 않은 체 남아 있었다.
'저하....'
연희는 금세 다시 찾아오는 세자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
주변이 어둠으로 어수룩하게 깔리고 있는 그 시간, 세자는 수현, 소연을 대동하고 좌포청을 나섰다.
어딘지 모르게 넋을 잃은 듯한 세자의 모습에, 수현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하루 종일 좌포청에서 함께 사교도 수사에 관해 조사하고 보고를 받았지만, 정작 세자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듯 보였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고, 수현의 한숨을 들은 소연은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나리..."
소연이 부르는 소리에 수현이 고개를 돌리자, 소연이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리와 저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연희에 관한 것이옵니다."
그 와중에 연희라는 이름이 들리자, 앞서 가던 세자가 말고삐를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연희? 연희라 하였느냐?"
소연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저하. 연희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서 해 보거라."
멈칫 소연이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잠시 저쪽에 보이는 정자에서 이야기 하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소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빈 정자 하나가 보였다.
"그래, 그리하자."
세자는 연희에 관한 것이라 하니, 체통도 잊은 체 서둘러 정자로 말을 돌렸다.
수현과 소연이 뒤따라 정자로 향했고, 세자는 정자에 들어서자마자 돌아서서 뒤따라오는 소연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자자, 어서 말해보거라. 연희에 관한 것이라니? 무엇이냐?"
소연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결심한듯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말했다.
"실은... 연희가 떠난 것은 저 때문이옵니다."
세자는 물론 수현도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수현이 다그쳐 물으니, 소연이 얼른 말을 이었다.
"사실 연희는 그몸의 주인이 아닙니다....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었습니다."
소연의 말에에 세자와 수현은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소연에게 확인하듯 되물었다.
"죽... 어? 원혼....이라고?"
"예, 저하. 연희는 이미 일찍이 죽어 원혼이 된 아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있지 않느냐?"
"예. 하오나 그것은 자신의 육신이 아닌, 다른 이의 육신으로, 타인의 육신에 깃들어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기생령이옵니다."
세자는 놀라 할말을 잃고 소연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았다.
수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연에게 재차 물었다.
"그 무슨 말이냐? 멀쩡히 살아있는 연희가, 죽은 원혼이고, 다른 사람 몸에 기생하는 기생령이라니?"
소연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얼른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연희는 이미 죽은 원혼이옵고, 지금 그 몸은 다른 이의 몸이옵니다. 다른 이의 몸에 깃들어 마치 그 사람인양 살고 있는 것이옵니다. 하여...."
소연이 말끝을 흐리자, 세자가 굳어진 표정으로 재촉하듯 물었다.
"하여?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무엇이라 말했느냐? 그 아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소연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 사실을 말하였고, 연희도 이미 알고 있사옵니다."
순간, 세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주춤거렸다.
그 사이, 소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떠나라 했습니다. 가서... "
소연은 연희에게 어떤 일을 맡겼는지 말하려 하였다.
하지만 세자는 "그만!" 하고 굳은 목소리로 세차게 말하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들으면.... 내 너를 용서치 못할 것 같으니... 그만 말하거라. 지금은 더 듣고 싶지 않다."
소연은 울상이 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저하."
세자는 혼자 아파했을 연희를 생각하자 마음이 쓰려왔다.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관심 없었다.
그게 누구이든 연희는 연희였다.
그 사실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그 사실을 연희가 알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죽어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고, 지금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연희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니 옆에 있어주지 못해 너무나 마음이 안타깝고 괴로웠다.
"그래서 떠난 것이라면....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것이다. 그럼...."
잠시 생각하던 세자가 이상한 듯 소연을 보며 물었다.
"헌데.... 기생령이라는 그것이... 원혼이라는 것이... 기억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냐?"
소연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소녀도 알길 없사오나... 연희는 매우 특별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세자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수현에게 물었다.
"네가 연희라면 어디로 갈 것 같으냐? 아니... 좀 더 정확한 물음을 한다면... 네가 연희라면,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을 것 같으냐?"
세자의 의도를 몰라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수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어쩌다 그리 됐는지... 궁금해할 듯합니다."
세자가 바로 맞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 사실을 알려면 어디로 가야 할 것 같으냐?"
"그야 물론.... 사교도 무리겠지요."
"바로 맞췄다. 천무방. 그들에게 갔을 것이다. 당장 천무방의 행적을 찾아보거라."
"예, 저하. 허나, 저하. 일단 환궁부터 하시지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천무방의 행적은 환궁하시는 대로, 소인이 찾아보겠습니다."
세자는 당장 자신이 나서고 싶었으나, 환궁하지 않으면 주상전하의 문책이 뒤따를 뿐아니라 자신의 행적에 대해 관심이 커질것이고, 그로인해 운신하기 어려워 질것이다.
"부탁하네.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야."
세자의 간곡한 부탁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동굴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니 제법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곳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먹이는 노모나, 누워있는 병자를 돌보는 모습 등, 예상외의 풍경에 연희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저는 죄다 무시무시한 사람들만 모여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입니다."
의외라는듯한 연희의 말투에 주동환이 그들을 한번 쭉 돌아보며 대답했다.
"대뜸 율교를 믿으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그리 말해서 믿는 사람은 없다. 처음엔 먹을 것을 주고, 입을 것을 주고, 아픈 가족을 돌봐주어, 그들의 마음을 먼저 얻고, 그리고 천천히 율교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면, 어느 순간 그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자리 잡게 되는 것이지."
연희는 마음이 편치 않은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연희를 달래고 싶은 마음에, 주동환이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모든 것이 정리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토록 바래 마지않는 세자는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권력을 쥐고, 용상에 오를 것이다."
연희는 의심의 눈길로 주동환을 쳐다보았다.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이 헛기침을 하며 돌아섰다.
"다, 아는 수가 있다."
주동환이 성큼성큼 걸어가버리자, 연희도 서둘러 뒤따라 걸었다.
동굴 안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주동환을 보면 깍듯이 인사를 했다.
거친 사내들부터, 나이 지긋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한결같이 존경 어린 표정으로 주동환을 바라보았다.
문득 연희가 그런 그들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저들은 마치... 율교가 아니라, 나리를 따르는 것 같습니다."
주동환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들은 율교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율교를 따르는 이들은 지금 이안에 없다. 이들은... 율교를 따르는 이들이, 율교를 따르도록 만든, 밑거름이 된 사람들이다."
연희는 정확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렴풋이 나마 무슨말인지 조금은 알것같기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느덧 두 사람은 제일 깊숙한 안쪽까지 다다랐다.
그곳에는 제법 깨끗해 보이는 천막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그 앞에 이르자 주동환이 연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이곳에 머물거라."
연희는 다른 곳보다도 깨끗한 천막 상태에, 어느정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곳은 나리가 머물던 곳 아닙니까?"
연희가 대번에 알아보자 주동환이 멋쩍게 웃어 보였다.
"괜찮다. 바로 옆에 새로 하나 설치할 것이니. 염려치 말고 이곳에서 쉬거라. 그리고 언제든 떠나고 싶으면 이야기하거라."
연희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떠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앞으로 어떻게 처신 해야할지 스스로 깨달을때까지는, 나리 곁에 있겠습니다."
연희의 대답에 주동환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래,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주동환이 발걸음을 옮겨 왔던 길로 되돌아 가려 하자, 등뒤에서 연희의 물음이 들렸다.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주동환이 멈칫하더니, 천천히 돌아서서 연희를 바라보았다.
"그래, 물어보거라."
"나리와 저는.... 어찌 알게 된 것입니까?"
주동환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연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죽어, 원혼이 되어 떠돌 때, 나는 이미 이 몸에 깃든 기생령이었다. 이 몸에 적응하고 있던 때였지. 떠돌던 네가 그 몸에 깃들 때,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뭔가 망설이는 듯한 주동환의 눈빛에 연희는, 무언가 더 물어보려다가 멈추었다.
어쩐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고, 물어보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망설이던 연희는, 다른 것을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제가 나리의... 연인...이었습니까?"
연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주동환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을... 이리도 너를 그리워할 줄 알았다면 말이다. 나는 분명 연심을 가졌었다. 나 자신도 몰랐을 뿐.... 너는.... 네게는 아마도... 그저 오라버니였겠지."
연희는 주동환의 말에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일말의 의심이 해소되자 조금쯤 마음이 편해졌다.
정말 연인이었다면, 꽤나 혼란스럽고 죄스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주동환은 잠시 망설이다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세자의... 어떤 부분이 그리도... 좋더냐?"
망설이듯 물어보는 주동환의 모습이 어쩐지 귀엽게 느껴져 연희는, 저도 모르게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연희의 웃음을 보자, 주동환은 민망함에 얼굴이 빨개져 버렸다.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냥 좋습니다. 그러는 나리는... 제가 어찌 좋습니까? 어디가 그렇게 좋습니까?"
웃으며 말하는 연희를 보며, 주동환 역시 편안한 웃음을 마주 지어주었다.
"그냥... 좋구나."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한참을 그렇게 오누이같이 다정한 웃음을 주고 받았다.
"쉬거라. 먹을 것을 좀 챙겨 오마."
"예, 나리."
주동환이 어딘가로 걸어가고, 연희는 천막 안에 들어가 오랫동안 걸어 고단한 몸을 내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먼길을 돌아 고향의 집에 돌아온 듯, 알게 모르게 불안했던 그 마음속 어딘가가 조금은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자의 곁을 떠나왔다는 쓸쓸함이 지워지지 않은 체 남아 있었다.
'저하....'
연희는 금세 다시 찾아오는 세자를 향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
주변이 어둠으로 어수룩하게 깔리고 있는 그 시간, 세자는 수현, 소연을 대동하고 좌포청을 나섰다.
어딘지 모르게 넋을 잃은 듯한 세자의 모습에, 수현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하루 종일 좌포청에서 함께 사교도 수사에 관해 조사하고 보고를 받았지만, 정작 세자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듯 보였다.
수현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고, 수현의 한숨을 들은 소연은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나리..."
소연이 부르는 소리에 수현이 고개를 돌리자, 소연이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리와 저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수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엇을 말이냐?"
"연희에 관한 것이옵니다."
그 와중에 연희라는 이름이 들리자, 앞서 가던 세자가 말고삐를 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연희? 연희라 하였느냐?"
소연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예, 저하. 연희에 대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서 해 보거라."
멈칫 소연이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손짓했다.
"잠시 저쪽에 보이는 정자에서 이야기 하심이 어떠하시옵니까?"
소연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빈 정자 하나가 보였다.
"그래, 그리하자."
세자는 연희에 관한 것이라 하니, 체통도 잊은 체 서둘러 정자로 말을 돌렸다.
수현과 소연이 뒤따라 정자로 향했고, 세자는 정자에 들어서자마자 돌아서서 뒤따라오는 소연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자자, 어서 말해보거라. 연희에 관한 것이라니? 무엇이냐?"
소연은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이내 결심한듯 아랫입술을 한번 깨물고는 말했다.
"실은... 연희가 떠난 것은 저 때문이옵니다."
세자는 물론 수현도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소연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수현이 다그쳐 물으니, 소연이 얼른 말을 이었다.
"사실 연희는 그몸의 주인이 아닙니다....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었습니다."
소연의 말에에 세자와 수현은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세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소연에게 확인하듯 되물었다.
"죽... 어? 원혼....이라고?"
"예, 저하. 연희는 이미 일찍이 죽어 원혼이 된 아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살아있지 않느냐?"
"예. 하오나 그것은 자신의 육신이 아닌, 다른 이의 육신으로, 타인의 육신에 깃들어 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기생령이옵니다."
세자는 놀라 할말을 잃고 소연을 멍청하게 바라만 보았다.
수현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소연에게 재차 물었다.
"그 무슨 말이냐? 멀쩡히 살아있는 연희가, 죽은 원혼이고, 다른 사람 몸에 기생하는 기생령이라니?"
소연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얼른 대답했다.
"그렇사옵니다. 연희는 이미 죽은 원혼이옵고, 지금 그 몸은 다른 이의 몸이옵니다. 다른 이의 몸에 깃들어 마치 그 사람인양 살고 있는 것이옵니다. 하여...."
소연이 말끝을 흐리자, 세자가 굳어진 표정으로 재촉하듯 물었다.
"하여? 그래서? 그 아이에게 무엇이라 말했느냐? 그 아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
소연이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 사실을 말하였고, 연희도 이미 알고 있사옵니다."
순간, 세자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듯 주춤거렸다.
그 사이, 소연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떠나라 했습니다. 가서... "
소연은 연희에게 어떤 일을 맡겼는지 말하려 하였다.
하지만 세자는 "그만!" 하고 굳은 목소리로 세차게 말하며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더 들으면.... 내 너를 용서치 못할 것 같으니... 그만 말하거라. 지금은 더 듣고 싶지 않다."
소연은 울상이 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예, 저하."
세자는 혼자 아파했을 연희를 생각하자 마음이 쓰려왔다.
그 내용이 사실이든 아니든 관심 없었다.
그게 누구이든 연희는 연희였다.
그 사실보다 더 마음 아픈 것은, 그 사실을 연희가 알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죽어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고, 지금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란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까... 연희 마음이 어떠했을지 생각하니 옆에 있어주지 못해 너무나 마음이 안타깝고 괴로웠다.
"그래서 떠난 것이라면.... 마음을 단단히 먹었을 것이다. 그럼...."
잠시 생각하던 세자가 이상한 듯 소연을 보며 물었다.
"헌데.... 기생령이라는 그것이... 원혼이라는 것이... 기억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냐?"
소연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것이... 소녀도 알길 없사오나... 연희는 매우 특별한 경우인 것 같습니다."
세자는 무언가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수현에게 물었다.
"네가 연희라면 어디로 갈 것 같으냐? 아니... 좀 더 정확한 물음을 한다면... 네가 연희라면, 이제 무엇을 하고 싶을 것 같으냐?"
세자의 의도를 몰라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수현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가 어쩌다 그리 됐는지... 궁금해할 듯합니다."
세자가 바로 맞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그 사실을 알려면 어디로 가야 할 것 같으냐?"
"그야 물론.... 사교도 무리겠지요."
"바로 맞췄다. 천무방. 그들에게 갔을 것이다. 당장 천무방의 행적을 찾아보거라."
"예, 저하. 허나, 저하. 일단 환궁부터 하시지요. 시간이 늦었습니다. 천무방의 행적은 환궁하시는 대로, 소인이 찾아보겠습니다."
세자는 당장 자신이 나서고 싶었으나, 환궁하지 않으면 주상전하의 문책이 뒤따를 뿐아니라 자신의 행적에 대해 관심이 커질것이고, 그로인해 운신하기 어려워 질것이다.
"부탁하네.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야."
세자의 간곡한 부탁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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