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17
천태산 자락으로 접어들 무렵부터, 땅이 흙색깔이 짙은 회색빛으로 변하고, 나무들도 창백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우거진 수풀에 햇빛이 가려져, 안쪽은 어스름하니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무서워..."
오공이 나래 등 뒤에 바짝 붙어 걸으며 몸을 움츠리자, 나래도 괜스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앞장서서 걷던 백하가 나래를 돌아보았다.
"천윤도를 꺼내보거라."
나래는 백하의 말에 품 안에서 천윤도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양손으로 천윤도를 꼭 잡고 홍저왕을 알려달라 마음속으로 외치니, 가운데 바늘이 빙글빙글 돌다가 한쪽을 가리켰고,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바늘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가자."
백하도령이 방향을 확인하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나래는 천윤도를 양손에 든 체로 백하를 따라 걸었다.
"흔하디 흔한 수피아 한 마리 안 보이는 구만."
따라가던 아토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초코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습하다."
"그러게, 습하네. 끈적끈적한 게... 영 찝찝해."
아토가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을 때, 문득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모두 그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주위의 자그마한 나무들이 흔들거리다가 불쑥 솟아올랐다.
놀랍게도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는 그것들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앙상한데다가 배만 볼록 나와 보였다.
백하가 주위를 경계하는 사이, 그들 중 하나가 말을 건네 왔다.
"이곳에는 어찌 온 것인가?"
그의 질문에 백하가 나서 대답했다.
"나는 천인이다. 홍저왕을 만나기 위해 왔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그것들이 일제히 낄낄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홍저왕이 누가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는 분이시라 생각하는 것인가? 이곳에서 천인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다."
백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뿐이다. 어찌하여 길을 막는 것이냐? 그만 비키거라."
백하의 경고에 그것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겁을 먹은 오공이 나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솔이에게 물었다.
"저것들은 뭐야? 왜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
솔이도 무서운 듯 오공처럼 나래 곁에 바짝 붙어 대답했다.
"이매(魑魅)들이어요. 목석의 정령들인데, 홍저왕을 따르는 도깨비들이어요."
나래는 솔이가 도깨비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는 용기를 내서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는 사람입니다."
나래가 나서 자신을 밝히자, 이매망량들 표정에 놀라움이 드리워졌다.
"사람...?"
"사람이라고?"
다들 놀란 표정으로 나래를 쳐다보았고, 그중 하나가 나래 가까이 다가오자, 백하가 견제하듯 그와 나래 사이에 섰다.
그것은 백하를 보며 물었다.
"정녕 사람인가? 어찌 사람이 이 누리에 있는 것이지?"
"그것은 우리도 알지 못한다. 하여 홍저왕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백하의 대답을 들은 이는, 물끄러미 백하를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천윤도가 있다 해도 쉬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과 동시에 다른 이매들이 모두 땅속으로 들어가 다시 나무의 모습만 드러냈다.
홀로 남은 이매가 돌아서서 걸으며 말했다.
"따라오거라."
백하는 나래를 돌아보았고, 나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도 괜찮은 거야? 우릴 속이는 거면 어떡하려고?"
오공이 무서워 소근거리자 나래가 따라가며 오공을 달랬다.
"도망만 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마주해야지."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오공의 되물음에 나래가 오공을 돌아보았다.
"뭐?"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뭘 해도 안되니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그랬잖아."
나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였을까? 저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스스로를 원망했던 것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나래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사라져 버린다잖아.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된다잖아."
"다른 방법을 찾으면 안 돼? 꼭 이 방법만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지금 다른 방법을 어떻게 찾아? 시간이 얼마나 남은 줄 알고?"
오공이 나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넌 나빴어."
"뭐?"
"넌 다른 사람들 말만 듣고, 내 말은 들어준 적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오공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애원했다.
"나 좀 내버려 두라고. 그냥 좀 놔두면 안 돼? 다 싫어, 그냥 좀 놔둬줘. 아무것도 하기 싫단 말이야."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본 나래는 가슴이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오공의 손을 붙잡고 힘을 주어 나아가며 말했다.
"해, 해야 돼. 해야 된다고!"
마치 자기 자신을 다그치듯 말하며 나아갈 때, 누군가 오공의 손을 붙잡은 자신의 손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걸음을 늦춘 백하가 나래와 오공의 손을 붙잡고 멈춰서 있었다.
백하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체 나래를 바라보자, 그 미소를 본 나래는 저도 모르게 오공의 손을 놓아주었다.
"괜찮다. 때론 무섭고, 때론 하기 싫을 때도 있는 법이니."
백하가 오공을 보며 달래듯 말을 하니, 울고 있던 오공이 울음을 멈추고 울먹거렸다.
"돌아가고 싶어요."
무서워하는 오공을 보며 백하는 주위를 살폈다.
빛을 가린 나무줄기는 창백했고, 바닥에 풀들은 청녹 빛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흙바닥은 질퍽하여 모두 죽어
있는 것만 같았다.
백하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바닥에 앉아 양손바닥을 땅바닥에 대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하의 손이 금빛으로 환하게 빛이 나는가 싶더니, 그 주위 풀들이 초록빛으로 변하며 생기를 머금었다.
백하를 주위로 원형을 그리며 그렇게 수풀과 나무들이 되살아 나는 듯하더니, 그 원이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순식간에 주위가 생생하고 푸른 초목으로 변하자 오공은 물론 백하와 솔이도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통 썩고 시든 것들만 가득했던 천태산 자락 한쪽이 완연히 살아나며 반짝거리자, 바닥의 돌들이 통통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 뭐야?"
오공이 놀라 그것들을 바라보니, 그것들은 금세 하얗고 반짝거리는 수피아로 변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맴돌았다.
"이쁘다."
오공이 감탄하며 좋아하고, 솔이와 나래도 수피아들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수피아들이 이매가 걸어간 방향으로 날아가자, 오공이 먼저 나서 따라가며 불렀다.
"같이 가!"
그 모습에 나래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달려 나간 오공을 따라 백하가 달려가자, 나래와 솔이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뒤를 쫓아 달렸다.
"뭐야? 갑자기 왜 달려?"
아토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초코마저 재빠르게 달려 나가자, 아토가 황당해하며 성질을 부렸다.
"야, 그렇게 갑자기..."
이내 아토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뒤쫓아 달렸다.
"야, 난 느리다고!"
앞서 나간 수피아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들했던 수풀은 되살아 나고, 나무는 생기를 되찾았으며, 앙상했던 가지에 새잎이 돋아났다.
반짝거리는 수피아들이 이윽고 어딘가에서 멈춰 섰고, 오공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그 앞에 멈춰 섰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사찰 입구에 모두가 멈춰섰고. 앞장서서 걸었던 이매는 그 입구 너머에 서 있었다.
또한 이매의 등 뒤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 그 안쪽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흑석궁이다. 들어올 수 있겠는가?"
이매의 물음에 나래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이상하네요? 흑석궁은 토굴이라더니..."
이매가 나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때론 토굴이었다가, 때론 사찰이었다가, 때로는 진짜 궁궐이 되기도 하지."
솔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래서, 찾기 힘들다고 한 모양이어요."
백하가 다가서서 주위를 살피자, 수피아들이 궁궐 입구를 지나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결계가 있는 모양이구나."
백하의 말에 이매가 그를 보았다.
"그렇다. 아주 강력한 결계가 이곳을 지키고 있지. 네가 아무리 천인이라 하여도, 이 결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네가 가진 힘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도 들어올 것인가?"
백하가 망설임 없이 들어가려 하자, 나래가 얼른 백하를 붙잡았다.
"저 때문에 위험한 곳에 가시게 둘 순 없어요."
그런 나래를 돌아보며 백하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 나를 믿으려무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너희를 지킬 것이다."
나래는 백하의 미소를 보는 순간, 어떻게라는 의문도 없이, 막연한 믿음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백하는 고개를 내려 아토를 보았다.
"아토. 그럼 부탁할게."
아토는 백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말을 남기고 아토는 다른 쪽으로 태연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디로?"
나래가 의아함에 아토를 바라보자, 백하가 나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은 그냥 믿고 따라오너라."
그 말과 동시에 백하는 아무런 스스럼없이 나래와 함께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솔이와 오공, 초코가 따라 들어섰고, 이를 본 이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분명 네놈들의 선택이렸다. 따라오너라. 그렇게 원하던 홍저왕을 뵙게 해 주마."
이매는 말을 마치고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고, 나래와 일행은 모두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안개를 뚫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어느 순간 안개는 사라지고 요괴들이 북적거리는 마을이 드러났다.
별의별 신기하게 생긴 외모에 놀랍기도, 또한 무섭기도 했지만, 이미 그럭저럭 익숙해진 나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일행이 당도한 곳은 널찍한 모래 공터였고, 모래 공터를 둥근 원형으로 빙 둘러진 것이 마치 원형 스포츠 경기장을 연상케 했다.
그곳에서 각양각색의 요괴와 도깨비들이 마치 경기를 관전하는 듯이 둘러서 구경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2층 장소가 보였고, 그 2층에 누군가가 앉아서 들어오는 나래와 일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흡사 원숭이 같은 용모에 코가 빨갛고, 귀밑까지 찢어진 입 사이사이에는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청록색 피부에 금색 털이 수북하게 나 있고, 목에는 사람의 해골 모양이 구슬처럼 장식된 목걸이를 하였으며, 붉은색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앞장서 가던 이매가 그 요괴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뒤돌아서 백하와 나래를 보며 말했다.
"저분이 홍저왕이시다."
백하와 나래의 시선이 홍저왕에게로 향했고, 홍저왕은 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백하와 나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거진 수풀에 햇빛이 가려져, 안쪽은 어스름하니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다.
"무서워..."
오공이 나래 등 뒤에 바짝 붙어 걸으며 몸을 움츠리자, 나래도 괜스레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앞장서서 걷던 백하가 나래를 돌아보았다.
"천윤도를 꺼내보거라."
나래는 백하의 말에 품 안에서 천윤도를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양손으로 천윤도를 꼭 잡고 홍저왕을 알려달라 마음속으로 외치니, 가운데 바늘이 빙글빙글 돌다가 한쪽을 가리켰고,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바늘이 가리키는 쪽으로 향했다.
"가자."
백하도령이 방향을 확인하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나래는 천윤도를 양손에 든 체로 백하를 따라 걸었다.
"흔하디 흔한 수피아 한 마리 안 보이는 구만."
따라가던 아토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초코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습하다."
"그러게, 습하네. 끈적끈적한 게... 영 찝찝해."
아토가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을 때, 문득 주변의 나무들이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모두 그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고, 주위의 자그마한 나무들이 흔들거리다가 불쑥 솟아올랐다.
놀랍게도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는 그것들은, 머리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앙상한데다가 배만 볼록 나와 보였다.
백하가 주위를 경계하는 사이, 그들 중 하나가 말을 건네 왔다.
"이곳에는 어찌 온 것인가?"
그의 질문에 백하가 나서 대답했다.
"나는 천인이다. 홍저왕을 만나기 위해 왔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그것들이 일제히 낄낄 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홍저왕이 누가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는 분이시라 생각하는 것인가? 이곳에서 천인은 그저 아무것도 아니다."
백하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뿐이다. 어찌하여 길을 막는 것이냐? 그만 비키거라."
백하의 경고에 그것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겁을 먹은 오공이 나래 등 뒤에 바짝 붙어서 솔이에게 물었다.
"저것들은 뭐야? 왜 머리에서 나무가 자라?"
솔이도 무서운 듯 오공처럼 나래 곁에 바짝 붙어 대답했다.
"이매(魑魅)들이어요. 목석의 정령들인데, 홍저왕을 따르는 도깨비들이어요."
나래는 솔이가 도깨비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는 용기를 내서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저는 사람입니다."
나래가 나서 자신을 밝히자, 이매망량들 표정에 놀라움이 드리워졌다.
"사람...?"
"사람이라고?"
다들 놀란 표정으로 나래를 쳐다보았고, 그중 하나가 나래 가까이 다가오자, 백하가 견제하듯 그와 나래 사이에 섰다.
그것은 백하를 보며 물었다.
"정녕 사람인가? 어찌 사람이 이 누리에 있는 것이지?"
"그것은 우리도 알지 못한다. 하여 홍저왕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이다."
백하의 대답을 들은 이는, 물끄러미 백하를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섰다.
"천윤도가 있다 해도 쉬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말과 동시에 다른 이매들이 모두 땅속으로 들어가 다시 나무의 모습만 드러냈다.
홀로 남은 이매가 돌아서서 걸으며 말했다.
"따라오거라."
백하는 나래를 돌아보았고, 나래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이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따라가도 괜찮은 거야? 우릴 속이는 거면 어떡하려고?"
오공이 무서워 소근거리자 나래가 따라가며 오공을 달랬다.
"도망만 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마주해야지."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오공의 되물음에 나래가 오공을 돌아보았다.
"뭐?"
"아무것도 하지 말자며, 뭘 해도 안되니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고 그랬잖아."
나래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였을까? 저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스스로를 원망했던 것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순간 갈피가 잡히지 않았던 나래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사라져 버린다잖아. 존재하지 않았던 게 된다잖아."
"다른 방법을 찾으면 안 돼? 꼭 이 방법만 있는 건 아닐 거 아냐?"
"지금 다른 방법을 어떻게 찾아? 시간이 얼마나 남은 줄 알고?"
오공이 나래를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넌 나빴어."
"뭐?"
"넌 다른 사람들 말만 듣고, 내 말은 들어준 적 없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오공이 눈물을 왈칵 쏟으며 애원했다.
"나 좀 내버려 두라고. 그냥 좀 놔두면 안 돼? 다 싫어, 그냥 좀 놔둬줘. 아무것도 하기 싫단 말이야."
자신이 우는 모습을 본 나래는 가슴이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오공의 손을 붙잡고 힘을 주어 나아가며 말했다.
"해, 해야 돼. 해야 된다고!"
마치 자기 자신을 다그치듯 말하며 나아갈 때, 누군가 오공의 손을 붙잡은 자신의 손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걸음을 늦춘 백하가 나래와 오공의 손을 붙잡고 멈춰서 있었다.
백하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체 나래를 바라보자, 그 미소를 본 나래는 저도 모르게 오공의 손을 놓아주었다.
"괜찮다. 때론 무섭고, 때론 하기 싫을 때도 있는 법이니."
백하가 오공을 보며 달래듯 말을 하니, 울고 있던 오공이 울음을 멈추고 울먹거렸다.
"돌아가고 싶어요."
무서워하는 오공을 보며 백하는 주위를 살폈다.
빛을 가린 나무줄기는 창백했고, 바닥에 풀들은 청녹 빛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흙바닥은 질퍽하여 모두 죽어
있는 것만 같았다.
백하가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바닥에 앉아 양손바닥을 땅바닥에 대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하의 손이 금빛으로 환하게 빛이 나는가 싶더니, 그 주위 풀들이 초록빛으로 변하며 생기를 머금었다.
백하를 주위로 원형을 그리며 그렇게 수풀과 나무들이 되살아 나는 듯하더니, 그 원이 빠른 속도로 커져갔다.
순식간에 주위가 생생하고 푸른 초목으로 변하자 오공은 물론 백하와 솔이도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온통 썩고 시든 것들만 가득했던 천태산 자락 한쪽이 완연히 살아나며 반짝거리자, 바닥의 돌들이 통통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어? 뭐야?"
오공이 놀라 그것들을 바라보니, 그것들은 금세 하얗고 반짝거리는 수피아로 변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맴돌았다.
"이쁘다."
오공이 감탄하며 좋아하고, 솔이와 나래도 수피아들의 모습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수피아들이 이매가 걸어간 방향으로 날아가자, 오공이 먼저 나서 따라가며 불렀다.
"같이 가!"
그 모습에 나래가 놀란 표정을 짓는 것도 잠시, 달려 나간 오공을 따라 백하가 달려가자, 나래와 솔이도 서로 얼굴을 쳐다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 뒤를 쫓아 달렸다.
"뭐야? 갑자기 왜 달려?"
아토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초코마저 재빠르게 달려 나가자, 아토가 황당해하며 성질을 부렸다.
"야, 그렇게 갑자기..."
이내 아토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뒤쫓아 달렸다.
"야, 난 느리다고!"
앞서 나간 수피아들이 지나는 곳마다 시들했던 수풀은 되살아 나고, 나무는 생기를 되찾았으며, 앙상했던 가지에 새잎이 돋아났다.
반짝거리는 수피아들이 이윽고 어딘가에서 멈춰 섰고, 오공을 비롯한 일행 모두가 그 앞에 멈춰 섰다.
꽤 오래되어 보이는 낡은 사찰 입구에 모두가 멈춰섰고. 앞장서서 걸었던 이매는 그 입구 너머에 서 있었다.
또한 이매의 등 뒤로 짙은 안개가 끼어 있어 그 안쪽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흑석궁이다. 들어올 수 있겠는가?"
이매의 물음에 나래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이상하네요? 흑석궁은 토굴이라더니..."
이매가 나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때론 토굴이었다가, 때론 사찰이었다가, 때로는 진짜 궁궐이 되기도 하지."
솔이가 신기하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래서, 찾기 힘들다고 한 모양이어요."
백하가 다가서서 주위를 살피자, 수피아들이 궁궐 입구를 지나지 못하고 주위만 맴돌았다.
"결계가 있는 모양이구나."
백하의 말에 이매가 그를 보았다.
"그렇다. 아주 강력한 결계가 이곳을 지키고 있지. 네가 아무리 천인이라 하여도, 이 결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네가 가진 힘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도 들어올 것인가?"
백하가 망설임 없이 들어가려 하자, 나래가 얼른 백하를 붙잡았다.
"저 때문에 위험한 곳에 가시게 둘 순 없어요."
그런 나래를 돌아보며 백하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으니, 나를 믿으려무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너희를 지킬 것이다."
나래는 백하의 미소를 보는 순간, 어떻게라는 의문도 없이, 막연한 믿음이 마음속에 피어올랐다.
백하는 고개를 내려 아토를 보았다.
"아토. 그럼 부탁할게."
아토는 백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 말을 남기고 아토는 다른 쪽으로 태연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디로?"
나래가 의아함에 아토를 바라보자, 백하가 나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지금은 그냥 믿고 따라오너라."
그 말과 동시에 백하는 아무런 스스럼없이 나래와 함께 입구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솔이와 오공, 초코가 따라 들어섰고, 이를 본 이매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분명 네놈들의 선택이렸다. 따라오너라. 그렇게 원하던 홍저왕을 뵙게 해 주마."
이매는 말을 마치고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했고, 나래와 일행은 모두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안개를 뚫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어느 순간 안개는 사라지고 요괴들이 북적거리는 마을이 드러났다.
별의별 신기하게 생긴 외모에 놀랍기도, 또한 무섭기도 했지만, 이미 그럭저럭 익숙해진 나래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일행이 당도한 곳은 널찍한 모래 공터였고, 모래 공터를 둥근 원형으로 빙 둘러진 것이 마치 원형 스포츠 경기장을 연상케 했다.
그곳에서 각양각색의 요괴와 도깨비들이 마치 경기를 관전하는 듯이 둘러서 구경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화려하게 꾸며진 2층 장소가 보였고, 그 2층에 누군가가 앉아서 들어오는 나래와 일행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흡사 원숭이 같은 용모에 코가 빨갛고, 귀밑까지 찢어진 입 사이사이에는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청록색 피부에 금색 털이 수북하게 나 있고, 목에는 사람의 해골 모양이 구슬처럼 장식된 목걸이를 하였으며, 붉은색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
앞장서 가던 이매가 그 요괴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더니, 뒤돌아서 백하와 나래를 보며 말했다.
"저분이 홍저왕이시다."
백하와 나래의 시선이 홍저왕에게로 향했고, 홍저왕은 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백하와 나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