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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1.43분

48화 - #1


능선을 따라 초록빛 굴곡을 만들어내던 산자락의 나무들이 어느새 하나둘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넙적한 바위 하나가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티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바위를 정자 바위라고 불렀다.

정자처럼 사람들에게 쉴 자리를 내 주고, 그 곁에는 높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제법 그럴싸한 그늘도 만들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희는 그 정자 바위에 걸터앉아, 양다리를 양손으로 끌어안은 체 멍한 표정으로 저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땅위로 떨어져 버석하게 메말라 버린 나뭇잎이, 무거운 발걸음에 으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주동환이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있었다.

"보고 싶으냐?"

주동환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묻는 말에, 연희가 쓸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니라고...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일까요?"

"내게 그럴 필요는 없다."

연희는 시선을 다시 앞쪽 풍경으로 돌렸다.

어느새 차가워진 바람이 온몸을 스쳐 지나가고, 수풀 속에서는 이름 모를 벌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곳은 산속이라 금방 어두워지고, 또 추워질 것이다."

연희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다른 말을 하였다.

"영혼이 소멸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마치... 모든 것을 잊은 것 같은... 그런 것일까요?"

연희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서우냐?"

연희는 슬픈 표정으로 애써 웃음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무섭습니다. 원래 죽었고, 아니 이미 죽었어야 했고, 이제 다시 죽으면 영혼조차 사라져 버린다고 하니, 무섭습니다."

주동환이 천천히 연희 옆에 기대어 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세상 어느 누구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그저, 죽을 때까지 주어진 삶을 살 뿐이다. 연희야, 지금의 이 삶도, 그저 너에게 주어진 삶이라 생각하거라."

연희는 주동환을 보며 씁쓸한 웃음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제가 산 시간만큼,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자기 삶을 잃어버리는 것 아닙니까?"

연희의 그 질문에, 주동환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제가 궁금해하는 것에, 하나씩 답을 주신다 하셨지요?"

난데없는 질문에 주동환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이다 이내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하였지. 또 궁금한 것이 있느냐?"

연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말해보거라."

"교주, 아니 당주라는 그 사람... 천태호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연희의 물음에 주동환은 잠시 망설였다.

이내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내게서 정보를 얻어 세자에게 알려줄 생각인가 보구나..."

주동환의 중얼거림에 연희는 숨을 잠시 멈추었다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닙니다. 그저 궁금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다시... 저하를 만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연희의 쓸쓸한 표정을 보며 주동환은 다시금 낮은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나도 죽어 원혼이 되었을 때, 알게 된 사람이다. 강력한 주술을 쓸 수 있는 주술사였지. 나같이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자고 하더구나."

그 말에 연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벌써부터 다른 억울한 이들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윤세영 같은...."

연희가 투덜거리듯 불만스럽게 이야기하자, 주동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지. 이유야 어쨌든 당시에는 그런 이유로 그 사람을 따랐고, 이렇게 기생령이 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너를 만났고..."

"피~"

연희는 입술을 삐죽거렸고, 주동환은 그런 연희를 보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치밀하기보다는 즉흥적이고, 꽤나 감정적인 사람이나, 주술적 능력은 탁월한 사람이다. 또한 사람의 심리를 잘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지."

문득 연희가 다시 물었다.

"헌데... 나리께서는 어쩌다 원혼이 되신 겁니까?"

주동환은 연희의 물음에 허망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전 호조참판이었던 표문량 대감의 서자다. 어머니는...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나를 낳았다. 그런 이유로 어려서부터 대감을 미워했고, 또 증오했다."

주동환이 먼 경치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한 번도 아버지라 부른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다. 운이 좋아 조선제일검 홍여립의 제자가 되었고, 최선을 다했다. 스승님이 관직에 오르면서 제자인 나도 따라서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내금위의 일원이 되어 주상전하와 세자마마의 곁을 지킬 수 있었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지난날이 떠오른 듯 주동환의 얼굴에 순간 분노가 어렸다.

"대감은 어떤 이들과 대업을 도모하다 대역죄로 잡혔다. 삼족을 멸하라는 명으로, 나는 평생 증오했던 아버지란 존재 때문에 형장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단 한 번도... 단 한 번도 아버지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사람 때문에... 끌려가 처형당한 것이다."

연희는 주동환을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억울함이 이해가 되었기에, 조심스럽게 주동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미안해요."

연희의 말에 주동환은 저도 모르게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스스로도 놀라 눈물을 훔치며 당황스런 표정으로 연희를 보며 물었다.

"어찌 네가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냐?"

연희는 어깨에 올려놓은 손을 움직여 가볍게 위로하듯 두드렸다.

"누구라도, 그렇게 얘기해 줘야 할 것 같아서요. 미안하다고..."

연희의 부드러운 손길과 위로에 그동안 속으로 삭히며 참고있던 울분과 슬픔이 조금씩 사르르 녹아내리며 가슴이 아려왔다.

한참을 그렇게 말없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해가 많이 기울자 주동환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눈물자국을 지우듯 두손으로 얼굴을 한번 쓰윽 쓸어내리며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제 곧 저녁 준비를 할 것이니, 그만 들어가는 것이 좋겠구나."

주동환이 먼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어가기 시작하자, 연희도 곧 뒤따라 일어났다.

몇 걸음 먼저 걸어가던 주동환이 멈춰 서서 연희가 따라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자, 연희가 웃으며 말했다.

"항상... 먼저 가서 저를 기다리십니다."

주동환이 따라서 웃음 지었다.

"그럴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럴 것이다. 네가 올 것이라 여겨진다면, 그 기다림마저 내게는 즐거운 시간이니."

문득 연희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가지 않는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찾아야지. 네가 있을 만한 곳을."

연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생각에 잠긴듯 하다 이내 고개를 흔드는 연희를 보며 주동환이 의아한 듯 물었다.

"어찌 그러는 것이냐?"

연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누군가도.... 그리 생각할까 싶어서 그랬습니다. 아니겠지요. 제까짓게 뭐라고...."

주동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마치 체념하듯 이야기했다.

"이미 찾고 있을 것이다."

연희가 놀란 표정으로 주동환을 바라보자, 주동환이 말을 이었다.

"세자는... 그런 사람이다. 치밀해 보이지만, 정에 약하지."

주동환을 바라보는 연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슬픔을 참아내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저하는... 저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알아내려 하신다 하였습니다."

문득 연희의 눈이 휘둥그레 지며 주동환에게 물었다.

"허면... 이 문양이.... 이 문양이 그런 것이라면?"

굳어진 표정의 주동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맞다. 세자의 어머니, 중전마마는 기생령에 의해 희생당했다."

주동환의 말에 연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주, 중전 마마를요? 어.... 어떻게?"

"나도 자세한 것은 모른다. 어떤 경로를 통해 어떻게 접근하게 됐는지는 모르나, 아마도 좌상이 자리를 만들었겠지."

문득 주동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희를 바라보았다.

"내 방심한 사이, 네게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해버렸구나. 새겨듣거라. 이 말을 결코 어디 가서 함부로 발설해서는 안된다. 천방주가 마음만 먹으면, 네가 어디 있든 너에게 걸린 보호 주술을 풀어, 너를 그 몸에서 쫓아낼 수가 있다. 그러니 천방주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연희는 자신을 걱정하여 당부하는 주동환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지만, 이제와 그런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세자가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어머니 죽음에 얽힌 진실에 다가간 것 같아, 약간이지만 기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만 가자."

주동환이 이번에는 가차없이 앞장서 걸어갔다.

동굴 입구 쪽으로 내려가고 있을 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련의 주황색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깃발을 위시하여, 일사불란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저들은 누구입니까?"

"저들이 바로 율교의 교도들이다."

연희는 그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물었다.

"수가 제법 많습니다."

"그래, 저만큼의 사람들을 키워내느라 꽤 적지 않은 시간이..."

주동환이 체 말을 다하기도 전에, 갑자기 어디선가 조선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윗편에 서있던 주동환과 연희는 갑작스런 소리에 놀라 서로를 쳐다봤다.

"이 소린?"

그리고 동굴 쪽으로 다가오던 주황 깃발의 무리 역시 나팔소리에 당황하며 고개을 돌려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그러자 사방에서 함성소리 함께 포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너머로 화살이 날아들며, 주황 깃발을 들고 있는 이들이 하나둘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남은 무리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포도청이다!"

주동환이 놀란 표정으로 연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몸을 숙이거라."

주동환은 연희와 함께 수풀속으로 몸을 낮게 숨기며, 긴장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에 잠자코 있거라. 움직여서는 안 된다."

연희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주동환이 재빨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이대로 놔두면, 율교의 사람들은 물론 동굴 안 사람들까지 위험에 처할 것이다.

주동환은 칼을 뽑아 들고,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의 칼은 그의 동작만큼이나 빨라, 병사들은 그를 제대로 상대해보지도 못하고 쓰러져 갔다.

"하산하라!"

주동환은 동굴 안쪽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포도청 병사들을 산 아래로 유인할 생각이었다.

주동환의 외침에 우왕좌왕하며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율교의 교도들이 정신을 차리고 병사들을 상대하며 산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무리를 주동환이 앞장서서 이끌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만!"

어디선가 묵직한 호령 소리와 함께, 누군가 홀연히 나타나 주동환과 교도들의 앞을 막아섰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에, 그를 보는 순간 주동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우포청 포도대장인 박지언이었다.

박지언은 눈에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주동환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크고 묵직한 칼이 주동환을 향하고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니구나. 네놈은 내가 상대해 주마."

주동환은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손에 들린 칼을 꽉 쥐었다.

한편, 그런 상황을 알길 없던 연희는 수풀 속에 잠자코 조용히 숨어있다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빼꼼히 들어 바깥 상황을 살폈다.

"저깄다!"

그때였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포도청 병사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오고 있었다.

"악!"

연희는 너무 놀란 나머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연희?'

연희의 비명소리를 들은 주동환이, 연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박지언의 칼이 움직였다.

"적을 앞에 두고, 어딜 보는 게냐!"

벽력 같은 일갈과 함께, 박지언의 칼이 벼락같이 주동환에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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