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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상처

author
·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2.65분

26화 - #1


고단했던 하루가, 푸른 새벽빛과 함께 지나가고 있었다.

궁으로 돌아가기위해 무복으로 갈아입은 세자는 다소곳이 기다리며 서 있는 연희 곁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연희는 고개를 들어 세자를 바라보며 수줍은듯 기쁜 얼굴로 웃어 보였다.

"예, 저는 괜찮습니다. 저하께서는 어디 안 다치셨습니까?"

세자가 어깨를 으슥해 보이며 대답했다.

"나야, 이 정도는 뭐..."

잘생긴 용모에 냉정해 보이는 눈빛을 지닌 세자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연희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세자는 자신이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고 있다는걸 자각하지 못한 체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다,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함께 궁으로 가자. 지금 있는곳은 이제 노출되어 위험하니, 궁에 있는 것이 안전할 듯싶다."

뒤에서 막 환복한 수현이 나오다 세자의 말을 듣고 멈칫하자, 그 모습을 본 연희는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하,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니, 이번만 해도..."

문득 세자는 스스로 손을 잡고 따라나서던 연희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세자를 보며 연희가 말했다.

"저는 그곳에 잡혀서 간 것이 아닙니다."

세자는 몸을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알고 있다."

세자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연희는 어리둥절해졌다.

"예? 알고 계셨다구요?"

"그래. 그곳에 가기전 네 거처에 먼저 들렀었다... 네가 가는 모습을 보았다."

"아..."

연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자는 따라가던 사람이 누구냐고 어떻게 아는 남자냐고 정체를 따져 묻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곳에 가면... 기억을 찾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습니다."

연희의 대답에 세자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래서? 기억은 좀 찾았느냐?"

연희는 실망스럽다는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더 혼란스럽게만 되어 버렸습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내 너를 그냥 이렇게 위험에 방치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세자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수현이 나서 말했다.

"저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곳으로, 거처를 은밀하게 옮겨놓겠습니다. 궁궐에서는 오히려 구설수로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일단은 서둘러 환궁하시지요."

세자가 한숨을 내쉬더니, 품 안에서 붉은 표지의 책자를 꺼냈다.

"이것을 백무가 알아볼 수 있을것 같으냐?"

세자가 내미는 책자를 받아들고 수현은 다시한번 살펴보았다.

눈살을 찌푸리며 살펴보던 수현이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자세히 보지 못하였는데 다시 보아도 주술의 글귀 같습니다. 백무에게 청해 보겠습니다."

세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확인되는 대로 알려주게."

수하들이 세자 앞으로 말을 끌고 왔다.

세자가 말위에 오르고, 수현도 말위에 올랐다.

이어 수현이 연희를 보며 물었다.

"말을 탈 수 있겠느냐? 수하의 말을 내어주마."

"아뇨. 송구하오나, 말을 탈 줄 모릅니다."

"그래? 그럼 나와 함께 타자. 이리 오너라."

수현이 손을 내밀자, 세자는 순간 수현과 함께 말을 타는 연희의 모습을 떠올리곤 얼굴을 굳히며 자신도 모르게 얼른 나서 말했다.

"아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 탓이니... 내가 책임져야 하지 않겠느냐? 내 말을 함께 타자."

왠지 그녀곁에 수현이라 할지라도 다른 사내와 함께인것이 싫었다. 그러한 경험은 한번뿐이면 족했다.

수현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하.... 그것이..."

세자는 수현의 말을 못들은척 연희에게 손을 내밀었고, 연희도 티낼 수는 없지만 기쁜 마음으로 세자의 손을 잡고 말위에 올랐다.

세자의 뒤에 앉아 허리춤을 있는 힘껏 꼭 안자 세자의 몸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수현은 굳어진 얼굴로 연희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나무랐다.

"저하의 예체(睿體)에 그렇게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되는것이다.. 너무 그렇게 가까이..하... 궁궐예법이 그렇지 않.."

수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세자가 말을 끊었다.

"흠... 떨어지지 않도록 꽉 잡아라..."

세자의 말에 연희가 수현을 보며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오늘만큼은 연희도 그저 마음가는대로 행동하고 싶었다.

"잊으셨습니까? 소녀는 예법을 모릅니다. 오늘은 더더욱 모릅니다."

연희의 말에 세자의 얼굴에 은밀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수현은 자신도 이제 어쩔 수 없다는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가자."

세자가 말을 몰아 달리기 시작하자, 고개을 내젓고있던 수현도 정신차리며 수하들을 이끌고 이내 그 뒤를 따랐다.

연희는 세자의 등 뒤에 찰싹 달라붙었다. 세자의 듬직하고 넓은 등에 고개를 묻고있던 그녀의 얼굴에 행복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따스함,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다시 돌아와 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이렇게 가까이서 체온을 느끼고 있으니, 기분이 구름 위를 날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세자 역시 등 뒤에서 느껴지는 연희의 체온이 싫지 않았다.

어쩐지 그녀에게서는 향긋한 꽃내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고, 이 포근함은 평소 느껴보지 못했던 느낌이었기에, 조금이라도 더 오랫동안 느끼고 싶었다.

떠오르는 태양이 환하게 비춰주는 햇살 너머로, 두 사람을 감싸고 사라지는 상쾌한 바람을 뒤로하고 궁궐로 향했다.

정오 무렵, 일행은 궁궐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저하, 제가 연희를 집으로 바래다주고 오겠습니다."

수현의 말에 세자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연희 역시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세자의 말에서 내려섰다.

"몸조심하거라.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지체없이 말을 하고."

"예, 저하."

연희가 공손히 인사를 하니, 세자는 떨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애써 돌려 수하들과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궁궐 안으로 들어가 사라지는 세자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연희를, 수현은 씁쓸하게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가자."

수현의 말에, 연희도 어렵사리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연희가 수현의 말에 오르자, 수현은 천천히 말고삐를 돌려 집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또각거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연희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오의 궁궐 앞은 꽤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한 푼만 주십시오."

"먹을 것을 주십시오."

어디선가 난데없이 나타난 거지 무리가 수현과 연희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중에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아이들이 보여 연희는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쩌다가 저리 됐을까요?"

연희는 돌연 말위에서 내려섰다.

"뭐하는 것이냐?"

제아무리 말이 천천히 가고 있었다고는 하나, 생각지도 못하게 연희가 뛰어내리니 수현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연희는 품을 뒤적거리더니, 어디서 났는지 품 안에서 육포 같은 것을 꺼내었다.

사당에 있을 때, 혹시 중간에 먹을까 싶어 챙겨놨던 것이었다.

아이들은 연희가 품에서 먹을 것을 꺼내 내밀자, 서로 받으려고 몸싸움을 해대기 시작했다.

"자자, 충분하니, 싸우지 말거라."

연희가 달래며 육포를 골고루 나눠주자 이내 받아든 아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일부러 조금 남겨둔 육포를 들고, 다가오지 못하고 한걸음 멀리서 바라만 보고 있는 가장 어려 보이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너는 이름이 뭐니?"

해봐야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아이는 해맑은 얼굴로 연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삼길이라 합니다. 누이 말이 엄니가 갈래길에서 낳았다고, 삼길이라 지었다 했습니다."

아이의 말에 연희가 활짝 웃어 보이며 남은 육포를 내밀었다.

"그래. 이거 먹으렴."

연희는 왠지 육포를 받아먹는 삼길이를 보니 마음이 저릿하니 아팠다.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에 그런 것인가 싶었다. 곧 생각에서 벗어나 수현이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 멀지 않으니, 그냥 걸어가겠습니다."

연희의 말에 수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도 말에서 내려 말고삐를 잡고 함께 걸었다.

"말에서 그리 뛰어내리면 위험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거라."

수현의 당부에 연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나리."

그때였다. 체격이 좀 있어보는 덩치 큰 사내 서너 명이 두 사람 앞을 막아섰다.

그들 역시 거지차림이었는데, 거지 치고는 체격도 크고 표정도 험악해보였다.

"여, 인심 후한 애기씨가 계셨구만. 애들만 주지 말고 우리들도 좀 줍쇼?"

구걸하는 모양새가 거지가 아닌 강도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을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수현은 태연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너희들 그러다가 혼난다. 내가 조용히 말로 할 때, 얼른 가라."

수현의 천연덕스러운 어투에 그들은 도리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튼 양반이란 것들이 겁대가리가 없어요. 샹..."

수현은 절로 눈쌀이 지푸려 졌다.

한숨을 내쉬더니, 칼집에서 칼을 꺼내지 않은 체로 들어 보이곤 말했다.

"내가 많이 봐준다. 자자, 내가 눈 감을게."

수현이 정말로 눈을 감고, 칼집체로 칼을 들자 거지들이 낄낄거렸다.

"이 자식이 누굴 바보로 아나?"

거지 중 하나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수현은 거짓말처럼 그의 공격을 피하며,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어이쿠!"

거지가 바닥에 넘어지자, 다른 세명이 놀란 표정으로 황망히 쳐다보다, 이내 일갈을 하며 일제히 덤벼들었다.

눈을 감고있는 수현은 그들의 공격을 너무 쉽게 피하고 막아냈고, 마치 다 보고 있는 듯 움직였다.

"아악!"

순식간에 비명소리와 함께 거지들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수현이 비로소 눈을 뜨며 말했다.

"이것이 십보장(十步場)이란 것이다. 열 걸음 안에서는 낙엽 떨어지는 것까지 느낄 수 있지. 눈을 감아도 네놈들이 뭘 하는지 훤히 알 수 있단 말이다."

수현이 마치 잘난 척을 하듯 설명하자, 바닥을 뒹굴던 거지들이 머리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젠장... 고수다."

"가자..."

거지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부랴부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런 거지들을 보며 수현은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그래~ 다음부터는 나 보면 열 걸음 밖으로 도망치거라."

수현의 농담을 들으며, 연희가 다가와 감탄하며 물었다.

"신묘합니다. 그런 것은 처음 봅니다."

연희의 말에 수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것은 비산검술(庇山劍術)이란 것이다. 이 세상에 스승님과 나, 오직 둘만 알고 있지."

"정말 열 걸음 안에서는 눈을 감고도 다 아는 것입니까?"

"그러엄~"

수현이 뻐기며 어깨를 으슥하니, 연희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 지었다.

"그러면 나리께서 세자마마의 곁에 계신 동안에는 자객 같은 이들은 감히 함부로 다가오지 못하겠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나와 내 스승님이 각각 운검을 맡아 전하와 저하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아~ 그렇군요."

문득 연희를 본 수현이 설명하듯 이야기했다.

"운검이라고 하면 보통 전하의 곁을 지키는 것인데, 나는 특별히 어명을 받고 세자마마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

그러더니 다시 어깨에 힘을 주며 이어 말했다.

"뭐~ 나와 스승님에 대한 신뢰가 뭐 거의... 완벽에 가깝다~ 뭐 그런 얘기지."

그런 모습이 평소의 수현과 달리 익살스러워보여 연희는 연신 웃음을 지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연희가 다시한번 맞장구를 쳐주니, 수현은 더욱 기분이 좋은 듯 으슥 거렸다.

"자자, 어서 가자. 내가 사람들을 불러 집안을 살피고 실력이 출중한 이들로 보안을 더욱 강화할 것이니, 너는 그저 맘편히 쉬기만 하거라."

수현은 그리 말하며 말고삐를 잡고 기분 좋은 듯 성큼성큼 걸어갔고, 그 뒤를 연희가 웃으며 뒤따랐다.



***



"으아아 아~"

괴성을 지르며 물건을 집어던지자, 바닥에 떨어진 물건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미친 듯이 포효하는 천태호를 보며 주동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천태호 앞에는 주동환을 위시하여, 천무방의 당주급 인물들이 서 있었다.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체 면목없다는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간 어렵게 모은 재물이며, 많은 것들을 빼앗겼다. 이 빌어먹을..."

천태호는 연신 이를 갈며 분을 참지 못하고 욕을 해댔다.

"다른 것들은 상관없어. 마음만 먹으면 다시 금방 모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비책을 빼앗겨서는 안 돼."

앞에 있던 주동환이 그를 보며 말했다.

"어차피 일반 사람들은 봐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는 책입니다."

"물론 그렇지만... 읽을 수 있는 이가 한 명 있지."

이어 고개를 돌려 주동환을 보며 말했다.

"네가 할 일이 있다."

광기 어린 천태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 때가 된 듯 하구나."

돌연 천태호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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