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21
그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걸까?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런 의아함을 가지고 서 있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자동차 장난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미니 RC카였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장난감 자동차는 꽤나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분명 그가 어렸을 때 애지중지했던 장난감이다.
동생들이 욕심내서 손 못 대게 하려고 얼마나 윽박을 질렀던가?
튜닝 한번 해보겠다고 밤잠 설쳐가며 만지작 거렸고, 남들보다 성능이 조금이라도 더 나오게 하려고 공부 아닌 공부를 해야 했었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을 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제일 좋아하던 거지?"
그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해서,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고,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엄마...."
그의 눈앞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왕이 서 있었다.
저런 미소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었을까? 항상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대하던 엄마의 모습만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엄마가 환하게 웃는 얼굴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습이었을 텐데, 지금은 저렇게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구나.
"미안하다. 네 기분도 모르고... 그때, 동생들한테 양보하라고만 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한 번도 사과란 걸 해본 적 없는 엄마였다.
억척스럽기 그지없고, 고집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엄마라고.
여왕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려진 자동차 장난감을 쳐다보았다.
동생들이 가지고 놀고 싶어 할 때마다,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이라서 내어 주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땐 그게 뭐라고 그렇게나 필사적이었던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땐 다 그렇지 뭐..."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빛으로 여왕을 바라보던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꿈이지?"
여왕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체 대답했다.
"그래. 꿈이야."
그는, 아니 현서는 피식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나이 먹어서 별 꿈을 다꾸네."
"왜? 예쁜 여자가 아니라, 엄마라서 실망했어?"
장난스러운 여왕의 물음에 현서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예쁜 여자가 왜 나와? 꿈이라도 마누라가 알까 무섭다."
현서의 넉살에 여왕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현서는 이상했다.
꿈이란 것도 알고, 엄마가 나타나서 반갑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애써 울지 않으려 참는 현서의 모습을 보면서, 여왕이 말했다.
"너한테 짐을 너무 많이 지웠어. 엄마가 미안했어."
현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여왕이 말을 이었다.
"장남이라고... 첫째라고... 네가 원해서 맏이가 된 것도 아닌데... 미안했다."
현서가 고개를 숙였다.
"아냐. 뭘 그런 거 가지고... 다 그렇게 사는데 뭐..."
"그깟 공부가 뭐라고... 내가 널 그렇게 모질게 대했나 싶다."
"그 덕분에 잘 살고 있잖아. 그럼 된 거지."
"너는 혹시... 애들 공부 안 시켜?"
현서가 피식 싱겁게 웃었다.
"어, 난 안 시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잘했어."
"근데 애들 엄마가 시키네. 애들 엄마는 공부 좀 했으면 하나 봐."
여왕도 따라서 웃음 지었다.
"부모 마음이 다 비슷비슷한 거지."
"그런가 봐."
"애들은? 잘 지내?"
"응. 잘 지내. 요즘 애들이야 뭐 부족할 게 없잖아..."
말끝을 흐린 현서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어 말했다.
"엄마는..."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슬픔을 감추려 주먹을 꽉쥔 현서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가며 말했다.
"뭐라고... 물어야 할까? 엄마?"
결국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현서는 여왕을 응시하며 어색함을 감추려 애써 웃음 지었다.
"거기서... 잘 지내냐고 물어보면... 이상한가? 그렇지?"
그런 현서를 보며 여왕이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여기서 잘 지내."
"이다음에... 나도 거기 가는 건가? 거기서... 만날 수 있는 건가?"
애써 웃으며 묻는 현서를 보고 있자니, 여왕은 애잔함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가슴속에 맺혀 있던 말을 힘겹게 꺼내 들었다.
"그러엄."
현서는 슬픈 듯 웃음 지어 보였다. 그가 그녀의 거짓말을 눈치챈 것일까?
"그럼... 그때 뵈어요.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여기서 못다 한 효도 해줄라니까."
그냥 모르는 척해주는 것일까, 진담일까, 여왕은 그런 궁금함은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살다 와."
"더 이상 어떻게 더 잘살아? 그러니까 엄마야 말로 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현서는, 울컥한 기분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며 애써 자신을 가다듬었다.
손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있는 힘껏 힘을 주어 참아내던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공부시켰다고 원망한 적도 없고..."
다시 말끝을 흐린 그는 더이상 참아낼 수 없는 눈물을 연신 흘렸다.
"내 코가 석자라고, 엄마한테 소홀해서 미안했어."
"괜찮아. 너도 니 앞가림해야지."
"자식은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더니... 엄마나 아빠나... 기회를 주지 않은 건지...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외면한 건지..."
씁쓸하게 웃는 현서를 보며 여왕이 부드러움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현서야. 엄마 괜찮아. 엄마는..."
여왕도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너네 키우면서 행복했어. 그러니까 괜찮아."
현서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지내, 현서야."
여왕의 인사에 현서가 눈물을 훔치다 말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는 거야?"
"도윤이랑 하윤이한테 선물 주고 가야지."
"애들한테? 무슨 선물?"
"좋은 꿈 선물."
현서가 활짝 웃음 지었다.
"애들이 좋아하겠네."
"할미 얼굴 안 까먹었으려나?"
"기억할걸. 가끔 할머니 보고 싶다고 하거든."
"그래..."
그때였다. 누군가 현서의 곁을 스치며 튀어나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 여왕에게 안겼다.
그런데 여왕은 어느새 할머니 모습이 아닌, 젊은 시절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
현서가 놀라 멍하니 서 있자,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불쑥 손에 뭔가를 들어 보였다.
놀랍게도 그건 현서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빨간색 미니카였다.
그 모습을 본 현서는 얼른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여지껏 들고있던 빨간색 미니카가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 이거 봐 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서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이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현서는 엄마한테 자랑스럽게 RC카를 보여주며 말했다.
"나 2등 했다."
"2등?"
과장되게 놀라며 묻는 여왕의 모습에, 어린 현서는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응. 거기서 내가 제일 어렸어."
"우와~ 우리 현서, 이다음에 커서 레이싱 선수되겠네?"
여왕은 현서의 손을 붙잡았고, 어린 현서는 반대쪽 손에 들려있는 미니카를 흔들며 물었다.
"응, 나 진짜 잘하지?"
"그러엄~ 우리 현서는 뭐든 잘하지~"
현서는 손에 든 미니카로 허공을 달렸고, 여왕은 어린 현서의 손을 잡고 어른 현서의 반대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 엄마..."
어른 현서는 여왕을 나지막하게 부르려다가 멈추었다.
어린 현서의 손을 붙잡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가는 여왕을, 그는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죄송해요, 엄마..."
말끝을 흐리는 현서를 뒤로 하고, 여왕은 어린 현서와 함께 저 건너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현서도, 서서히 어둠 속에 묻혀 갔다.
***
여왕은 창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들어 있는 현서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여왕은 애잔한 웃음을 뒤로한 채 물러나야 했다.
나래는 그런 여왕의 한쪽 손을 꼭 잡은 체, 여왕의 슬픈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인사... 잘하셨어요?"
나래의 물음에 여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웃고 있지만, 목이 메어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원망하고 있던가요?"
여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 봐요.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했죠?"
여왕은 목이 메인 듯 계속 대답하지 못한 체 고개만 끄덕거렸다.
여왕이 애써 진정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옆에는 백하도령이 두 개의 몽실몽실한 꿈털을 들고 서 있었다.
"주세요."
여왕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백하도령이 두 개의 꿈털을 그녀의 손에 올려주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꿈인 것 같습니다."
백하도령의 말에 여왕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두 분한테..."
옆에서 나래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할머니 산타라고 해주세요. 선물은 제가 대신 보내드릴게요."
나래의 농담에 여왕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애들 이름이 뭐라구요?"
"도윤이, 하윤이... 도윤이는 중학교 2학년, 하윤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죠."
"애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찾아볼게요."
나래의 말에 여왕은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
"얼른 선물해주고 올게요."
"천천히 오셔도 돼요. 꿈속에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거든요."
여왕은 보라빛꿈털 두 뭉치를 들고 아이들 방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러 가는 산타할머니가 창문을 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내 아이들 꿈속으로 들어간 여왕을, 나래는 백하도령의 손을 잡아, 그를 통해서 꿈속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신이 난 아이들과, 기뻐하는 여왕을 보면서, 나래와 백하도령은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이날은, 꿈털을 든 수많은 강아지들이, 허공을 날아 아이들 꿈속을 방문하느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 밤이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서 있었던 걸까? 왜 이곳에 있는 걸까?
그런 의아함을 가지고 서 있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작은 자동차 장난감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배터리로 움직이는 미니 RC카였다. 붉은색으로 칠해진 장난감 자동차는 꽤나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이건 분명 그가 어렸을 때 애지중지했던 장난감이다.
동생들이 욕심내서 손 못 대게 하려고 얼마나 윽박을 질렀던가?
튜닝 한번 해보겠다고 밤잠 설쳐가며 만지작 거렸고, 남들보다 성능이 조금이라도 더 나오게 하려고 공부 아닌 공부를 해야 했었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서 있을 때,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제일 좋아하던 거지?"
그 목소리가 너무도 익숙해서,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고, 입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엄마...."
그의 눈앞에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여왕이 서 있었다.
저런 미소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었을까? 항상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대하던 엄마의 모습만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엄마가 환하게 웃는 얼굴은 추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모습이었을 텐데, 지금은 저렇게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구나.
"미안하다. 네 기분도 모르고... 그때, 동생들한테 양보하라고만 해서..."
생각해보지 못했다. 한 번도 사과란 걸 해본 적 없는 엄마였다.
억척스럽기 그지없고, 고집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엄마라고.
여왕의 말에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에 들려진 자동차 장난감을 쳐다보았다.
동생들이 가지고 놀고 싶어 할 때마다, 자신이 아끼는 장난감이라서 내어 주고 싶지 않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땐 그게 뭐라고 그렇게나 필사적이었던지...,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 그땐 다 그렇지 뭐..."
어쩐지 슬퍼 보이는 눈빛으로 여왕을 바라보던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꿈이지?"
여왕 역시 눈가가 촉촉해진 체 대답했다.
"그래. 꿈이야."
그는, 아니 현서는 피식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나이 먹어서 별 꿈을 다꾸네."
"왜? 예쁜 여자가 아니라, 엄마라서 실망했어?"
장난스러운 여왕의 물음에 현서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예쁜 여자가 왜 나와? 꿈이라도 마누라가 알까 무섭다."
현서의 넉살에 여왕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현서는 이상했다.
꿈이란 것도 알고, 엄마가 나타나서 반갑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애써 울지 않으려 참는 현서의 모습을 보면서, 여왕이 말했다.
"너한테 짐을 너무 많이 지웠어. 엄마가 미안했어."
현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여왕이 말을 이었다.
"장남이라고... 첫째라고... 네가 원해서 맏이가 된 것도 아닌데... 미안했다."
현서가 고개를 숙였다.
"아냐. 뭘 그런 거 가지고... 다 그렇게 사는데 뭐..."
"그깟 공부가 뭐라고... 내가 널 그렇게 모질게 대했나 싶다."
"그 덕분에 잘 살고 있잖아. 그럼 된 거지."
"너는 혹시... 애들 공부 안 시켜?"
현서가 피식 싱겁게 웃었다.
"어, 난 안 시켜.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
"잘했어."
"근데 애들 엄마가 시키네. 애들 엄마는 공부 좀 했으면 하나 봐."
여왕도 따라서 웃음 지었다.
"부모 마음이 다 비슷비슷한 거지."
"그런가 봐."
"애들은? 잘 지내?"
"응. 잘 지내. 요즘 애들이야 뭐 부족할 게 없잖아..."
말끝을 흐린 현서가 잠시 망설이다가 이어 말했다.
"엄마는..."
한참을 망설이던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슬픔을 감추려 주먹을 꽉쥔 현서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아가며 말했다.
"뭐라고... 물어야 할까? 엄마?"
결국은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리고, 현서는 여왕을 응시하며 어색함을 감추려 애써 웃음 지었다.
"거기서... 잘 지내냐고 물어보면... 이상한가? 그렇지?"
그런 현서를 보며 여왕이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 여기서 잘 지내."
"이다음에... 나도 거기 가는 건가? 거기서... 만날 수 있는 건가?"
애써 웃으며 묻는 현서를 보고 있자니, 여왕은 애잔함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가슴속에 맺혀 있던 말을 힘겹게 꺼내 들었다.
"그러엄."
현서는 슬픈 듯 웃음 지어 보였다. 그가 그녀의 거짓말을 눈치챈 것일까?
"그럼... 그때 뵈어요. 어디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여기서 못다 한 효도 해줄라니까."
그냥 모르는 척해주는 것일까, 진담일까, 여왕은 그런 궁금함은 그냥 묻어두기로 했다.
"엄마 걱정하지 말고, 잘살다 와."
"더 이상 어떻게 더 잘살아? 그러니까 엄마야 말로 내 걱정하지 마.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현서는, 울컥한 기분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하며 애써 자신을 가다듬었다.
손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있는 힘껏 힘을 주어 참아내던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 번도 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 공부시켰다고 원망한 적도 없고..."
다시 말끝을 흐린 그는 더이상 참아낼 수 없는 눈물을 연신 흘렸다.
"내 코가 석자라고, 엄마한테 소홀해서 미안했어."
"괜찮아. 너도 니 앞가림해야지."
"자식은 효도를 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더니... 엄마나 아빠나... 기회를 주지 않은 건지...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외면한 건지..."
씁쓸하게 웃는 현서를 보며 여왕이 부드러움이 한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현서야. 엄마 괜찮아. 엄마는..."
여왕도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너네 키우면서 행복했어. 그러니까 괜찮아."
현서는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잘 지내, 현서야."
여왕의 인사에 현서가 눈물을 훔치다 말고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는 거야?"
"도윤이랑 하윤이한테 선물 주고 가야지."
"애들한테? 무슨 선물?"
"좋은 꿈 선물."
현서가 활짝 웃음 지었다.
"애들이 좋아하겠네."
"할미 얼굴 안 까먹었으려나?"
"기억할걸. 가끔 할머니 보고 싶다고 하거든."
"그래..."
그때였다. 누군가 현서의 곁을 스치며 튀어나왔다.
놀라서 돌아보니 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가 여왕에게 안겼다.
그런데 여왕은 어느새 할머니 모습이 아닌, 젊은 시절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엄마..."
현서가 놀라 멍하니 서 있자, 갑자기 나타난 아이가 불쑥 손에 뭔가를 들어 보였다.
놀랍게도 그건 현서가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빨간색 미니카였다.
그 모습을 본 현서는 얼른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여지껏 들고있던 빨간색 미니카가 사라지고 없었다.
"엄마, 이거 봐 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현서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이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의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현서는 엄마한테 자랑스럽게 RC카를 보여주며 말했다.
"나 2등 했다."
"2등?"
과장되게 놀라며 묻는 여왕의 모습에, 어린 현서는 더욱 신이 나서 말했다.
"응. 거기서 내가 제일 어렸어."
"우와~ 우리 현서, 이다음에 커서 레이싱 선수되겠네?"
여왕은 현서의 손을 붙잡았고, 어린 현서는 반대쪽 손에 들려있는 미니카를 흔들며 물었다.
"응, 나 진짜 잘하지?"
"그러엄~ 우리 현서는 뭐든 잘하지~"
현서는 손에 든 미니카로 허공을 달렸고, 여왕은 어린 현서의 손을 잡고 어른 현서의 반대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어, 엄마..."
어른 현서는 여왕을 나지막하게 부르려다가 멈추었다.
어린 현서의 손을 붙잡고,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가는 여왕을, 그는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며 눈물을 흘렸다.
"죄송해요, 엄마..."
말끝을 흐리는 현서를 뒤로 하고, 여왕은 어린 현서와 함께 저 건너편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현서도, 서서히 어둠 속에 묻혀 갔다.
***
여왕은 창밖에서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잠이 들어 있는 현서의 눈에서 눈물 방울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서, 여왕은 애잔한 웃음을 뒤로한 채 물러나야 했다.
나래는 그런 여왕의 한쪽 손을 꼭 잡은 체, 여왕의 슬픈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인사... 잘하셨어요?"
나래의 물음에 여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웃고 있지만, 목이 메어 대답이 나오지 않아서였다.
"원망하고 있던가요?"
여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 봐요. 원망하지 않을 거라고 했죠?"
여왕은 목이 메인 듯 계속 대답하지 못한 체 고개만 끄덕거렸다.
여왕이 애써 진정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옆에는 백하도령이 두 개의 몽실몽실한 꿈털을 들고 서 있었다.
"주세요."
여왕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백하도령이 두 개의 꿈털을 그녀의 손에 올려주었다.
"아이들이 아주 좋아할 만한 꿈인 것 같습니다."
백하도령의 말에 여왕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두 분한테..."
옆에서 나래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할머니 산타라고 해주세요. 선물은 제가 대신 보내드릴게요."
나래의 농담에 여왕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애들 이름이 뭐라구요?"
"도윤이, 하윤이... 도윤이는 중학교 2학년, 하윤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죠."
"애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찾아볼게요."
나래의 말에 여왕은 말없이 웃음만 지었다.
"얼른 선물해주고 올게요."
"천천히 오셔도 돼요. 꿈속에서는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거든요."
여왕은 보라빛꿈털 두 뭉치를 들고 아이들 방 쪽으로 향했다.
그 모습이 마치,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러 가는 산타할머니가 창문을 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내 아이들 꿈속으로 들어간 여왕을, 나래는 백하도령의 손을 잡아, 그를 통해서 꿈속을 살펴볼 수 있었다.
신이 난 아이들과, 기뻐하는 여왕을 보면서, 나래와 백하도령은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이날은, 꿈털을 든 수많은 강아지들이, 허공을 날아 아이들 꿈속을 방문하느라 분주하기 이를 데 없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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