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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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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9.91분

44화 - #3


주동환이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에, 등 돌리고 앉아있던 천태호가 주동환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쩐지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는, 주동환의 인사를 받자마자 말했다.

"생각해보니까, 일이 여기까지 온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기왕지사 세자 몸을 취할 것이라면, 떨어진 왕권을 살려, 내가 왕이 됐을 때, 절대 권력이 되도록 할 생각이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를 주동환은 그저 표정없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좌상이 갑자기 태도를 바꾸면 사람들이 의심할 터, 그럴싸한 명분이 필요한데... 어찌하는 것이 좋겠느냐?"

천태호의 물음에 주동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일단 주상전하의 사람을 더 만들어야겠죠."

그의 말에 천태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좌상이 해온 행보가 있는데, 다짜고짜 주상의 사람을 앉히면 의심을 살 것이다."

"그러니, 대놓고 주상전하의 사람을 앉힐 것이 아니라, 겉보기엔 좌상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하의 사람을 앉혀야지요."

주동환의 말에 천태호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겉으로는 좌상의 사람인데, 실제로는 주상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누가 있지?"

"좌상의 권유로 후궁이 된 의빈마마의 부친, 유상옥 대감이 있지요. 안타깝게도 한때 좌상의 눈밖에 나서, 지금은 자택에서 근신 중인 것으로 압니다."

천태호의 눈이 반짝거렸다.

"어째서 그자가, 겉으로는 좌상 사람인데 실제로는 주상의 사람인 것이냐?"

"그는 좌상의 당여로, 비어있는 중전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좌상이 그의 여식을 후궁으로 간택되게 하였지요. 비록 중전의 자리에 들기도 전에 주상의 장인임을 내세웠다가, 내쳐지긴 했으나...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좌상의 당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허나, 엄연히 자기 여식이 주상전하의 여인이니, 왕권이 강화되는 것을 반길 것입니다."

천태호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상옥 대감이라... 좋은 선택이구나. 그런데 그 인간... 내 기억이 맞다면 꽤 멍청했었던 것 같은데..."

"근본이 경박한 사람이니, 되려 이용해 먹기는 쉬울 것입니다. 그간 절치부심 했을 테니, 경거망동하지 않을 것이고... 지금 써먹기 딱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 좋다. 그럼 그 사람을 어디 앉혀야 할까?"

"앞으로 주상전하에게 힘을 실어 주려면, 실권을 가져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요직이 바로 이조판서입니다."

"이판? 이판을 쳐내라는 것이냐?"

"그냥 쳐내서야 반발을 사겠지요. 현 호판대감이 벌써 일흔의 고령입니다. 이제 그만 낙향하여 쉬시라 하고, 현재 이판을 호판으로, 그리고 이판에 유상옥 대감을 앉히십시오. 이조판서는 조정 내 대소신료들의 인사를 책임지는 자리이니, 그 자리에 유상옥 대감을 앉히면, 이후 주상전하의 편에 설 사람을 등용하기가 수월해질 것입니다."

천태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과연... 좋은 생각이다. 헌데, 그 일을 어찌 진행해야 할까... 지금 좌상 행세를 하는 놈이... 그나마 서자 출신이라 좌상 행세를 시키긴 했어도, 대화가 길어지면 바로 의심을 살 것인데..."

주동환이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제게 생각이 있으니, 저한테 맡겨주십시오."



***



비가 내리고 있다.

차라리 시원하게 쏟아부으면 속이라도 후련할 텐데..., 추적추적하게 내리고 있었다.

처마 끝에 서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는 연희의 표정은 무심하였지만, 그 눈빛은 쓸쓸함에 젖어 있었다.

이 몸을 본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할 몸이라고 생각하니, 자신이 굉장히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돌려준다는 것은 곧 자신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죽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그녀에게 죽음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마치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허망한 듯, 의미를 잃고 있는 와중에, 소중하게 생각한 것들은 더욱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동안은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면,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도 명확해진 반면에, 그것이 초래할 결과가 너무도 두려웠다.

세자가 떠올랐다.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이제 그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되지 않았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세자에게서 비롯된 이유였다.

이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유가 자신에게도 생겨난 것이다.

'나가자. 더 이상 이곳에 있는 것은, 저하에게도, 자신에게도, 잘못된 일이다.'

연희는 궁을 나가 주동환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서, 어떻게 자신이 다른 사람의 육신에 깃들 수 있었는지, 그전에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더 많은 것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이상 소연의 말대로 이 이상 더 미룰 수는 없다.

연희는 몸을 돌려 처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걸어가던 연희는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세자의 행렬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자를 보는 순간, 연희는 저도 모르게 한쪽에 몸을 숨겼다.

'왜?'

연희는 왜 자신이 숨는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왠지 숨어야만 할 것 같았다.

세자를 마주하면 자신의 모든 정체를 들켜버릴 것만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몸을 숨긴 연희가 조심스럽게 바깥 동태를 살피니,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세자의 모습이 보였다.

연희는 들킬세라 얼른 다시 몸을 숨겼다.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 세자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속상하고 한없이 미안한 마음에, 슬픈 눈물이 뺨위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대로 곁에 있을 수 없었다.

거짓으로, 세자를 속이는 것도 싫고 자신의 실체를 알고 경악할 세자의 모습을 보는건 더더욱 싫었다.

이 모든 것을, 이제는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



좌상대감의 집에 삼삼오오 모여든 이들은, 바로 육조의 판서중 호판을 제외한 다섯 명과 우의정이었다.

이들이 좌상의 집 앞에 당도하자, 이내 하인들이 마중나와 좌상의 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들어선 방안에는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좌상이 상석에 좌정하고 있었고 그 모양새가 영락없는 병자의 행색이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주동환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가, 대감들이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였다.

대감들은 주동환이 좌상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불편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였다.

"좌상대감,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근래 들어 빈청에도 들지 아니하시고..."

우상이 걱정스러운 어투로 먼저 말을 던졌다. 이어 주동환이 귀를 좌상대감 앞으로 바짝 갖다 대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마치 좌상이 주동환에게 귓속말을 하는 듯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고, 이내 주동환이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먼저 자리들 앉으시지요. 대감마님께서 목이 불편하시어, 말을 하기 어려우니, 제가 대신 말을 전하라 하십니다."

대감들은 그제야 주동환이 이 자리에 함께하는것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찌 이렇게 모이라 하셨습니까?"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병판이 나서 묻는 말에, 주동환이 다시 좌상의 입 앞으로 귀를 가져다 댔다가, 이내 자세를 바로하며 대답했다.

"급히 논의할 일이 있어 부르셨다 합니다."

"논의요?"

병판의 되묻는 질문에, 주동환이 다시금 좌상의 입에 귀를 가져다 대고는, 한참을 이야기를 들은 후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현 호판대감께서 이미 고희(古稀)를 넘기신 지 한참입니다. 이제 그만 고단한 정사를 내려놓고 낙향하여 평안한 여생을 보내시게 함이 어떠하신지 묻고 계십니다."

그의 말에 대감들이 모두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거라면야, 응당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우상이 나서 대답하니, 주동환이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하여, 호조판서의 자리에, 현 이조판서를 맡고 계신 고숭렴 대감께서 맡아주셨으면 한다 하십니다."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이판대감에게 향했다.

이판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헛기침을 두어 차례 하고 대답했다.

"뭐... 좌상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야 뭐.. 그렇게 하지요."

이판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다들 따라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좌상을 바라보았다.

그런 좌중을 둘러본 주동환이 조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조판서에는, 그간 소원하였던 유상옥 대감을 불러왔으면 한다 하십니다."

주동환의 말이 끝나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이어 병판이 나서 물었다.

"허나, 좌상대감, 유대감은... 그 행실이 바르지 못해 중용하지 않았던 것 아니었습니까?"

병판의 물음에, 주동환이 좌상의 입에 귀를 기울이고는, 다시 자세를 바로하며 대답했다.

"그간 절치부심 하였을 것이니, 이제 행실을 함부로 하지는 않을 것이라 합니다."

주동환의 대답에 대감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거렸고, 주동환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한 사람인데, 어찌 내버려만 둘 수 있느냐 하십니다. 대감님들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주동환이 노린 한수는 이것이었다.

가뜩이나 최근에 좌상과 사이가 껄끄러웠던 이판과 병판이다.

다른 대감들도 그 내막을 모르지 않는 상황에서, 좌상이 과거에 등져 소원해진 이를 다시 중용하는 모양새를 보여준 것이다.

즉, 서먹한 대감들에게 "용서"를 보여준 것이다.

병판과 이판의 입장에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 처지가 언제 자신들과 바뀔지 모르는 것이, 바로 이 정치판이기 때문이다.

"그리 하시지요. 그간 많이 뉘우쳤을 것입니다."

병판의 의미심장한 어조에 이판도 고개를 끄덕거렸고, 다른 대감들도 모두 수긍하듯 끄덕거렸다.

"그럼, 그에 따른 진행은 우상대감께서 맡아주시기를 부탁하고 계십니다. 몸이 많이 좋지 않아, 당분간은 빈청에 나가기 힘들 듯 하다고 하십니다."

우상대감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좌상대감. 이 사람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좌상대감이 만족스러운 듯, 대감들을 둘러보며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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