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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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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나
· 최초 등록: 2025.09.14 · 최근 연재: 2025-10-26
읽기 시간 예측: 약 10.1분

34화 - #2


서책을 보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건만,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자꾸만 헛웃음만 튀어나왔다.

오랜 시간 텅 비어 있던 가슴속에, 그 어떤 따스한 감정이 서서히 차오르는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연희를 상상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르더니, 이내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내관이 의아한 듯 세자의 눈치를 살피자, 세자는 금세 정색을 하고 다시 서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이런 게 행복이라는 감정일까? 이제서야 행복이란 감정에 눈을 뜨게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분명 조금 전에 보고 왔음에도,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다시 또 보러 가고 싶었다.

어찌하다 이런 감정이 되어 버린 것일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보고 싶고, 곁에 두고 싶게 된 것일까?

이제와 과정은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이순간 이토록 보고 싶으니까.

"금호의 상태가 궁금하니, 한번 살펴봐야겠구나."

마치 누구더러 들으란 듯이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를 본 내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하, 서책을 펴신 지 아직 한식경이 채 되지 않았사옵니다. 근래 들어 조강은 물론이고, 주강이나 석강도 물리시는 일이 빈번하여 주상전하께옵서 심려가 크시옵니다."

내관의 말에 세자가 정색을 했다.

"허허, 내 일국의 큰일에 힘쓰는 것이고, 이는 곧 아바마마의 선정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어찌 한치 앞만을 살피는 것이냐?"

"망극하옵니다. 저하..."

세자는 내심 찔리는 것이 좀 있긴 했지만,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일단 명목은 수현을 살피는 것이긴 했지만, 이미 거의 회복단계에 접어든 수현의 상태를 굳이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외출이 없는 날이면 수현의 간병을 하느라 옆에 있을 연희를 보러 가기 위함임을, 스스로는 잘 알고 있었다.

"저하..."

수현과 연희가 머물고있는 궁 지척에 이르렀을 무렵, 어디선가 세자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세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보니, 혜령옹주가 몇 걸음밖에 서 있었다.

그녀 역시 이곳으로 오던 발길이었던 듯했다. 세자에게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하며 물었다.

"누구를 뵈오러 오셨습니까?"

웃으며 묻고 있으나, 날이 선 질문이었다.

세자는 언짢은듯 한쪽 눈썹을 한번 들었다 내리고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누구를 보러 왔냐니? 당연히 금호를 살피러 온 것이 아니냐?"

"그렇습니까? 제가 오해했나 봅니다."

나긋나긋 대답하지만, 어쩐지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만 같은 혜령옹주였다.

"듣자 하니, 근자에는 그 아이와 함께 좌포청의 수사를 돕는다 들었습니다."

"그렇다. 사교도 무리의 혹세무민이 극에 달했으니, 철저하게 수사하고 밝혀 그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혹여, 그 아이에게 연심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시겠지요?"

혜령옹주의 질문에 세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냐? 연심이라니?"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그의 얼굴에 그려진 당혹감은 쉬이 감춰지지 않았다.

그런 세자의 안색을 살피며 혜령옹주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예, 물론 그러시겠지요. 설마 사교도의 일원일지도 모르는, 신분도 모르는 여인에게 연심을 품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리 믿겠습니다."

세자는 슬며시 기분이 나빠지자 절로 목소리가 매섭게 나왔다.

"뭘 그리 꼭 선을 긋듯이 이야기하는 것이냐? 그녀는 분명 사교도의 일원이 아니다. 또한 신분도 분명 천인은 아닐 것이다. 설령 천인이라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라도 되는 것이냐?"

세자의 말에 혜령옹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 문제가 되지요. 중인이어도 문제고, 천인이면 더더욱 문제지요. 사교도의 일원이 아니라 확신하시니 다행입니다. 허나, 그녀가 사교도의 일원이 아니란 것이 진실이라 하여도, 사교도의 일원인 것처럼 꾸미는 것쯤은 그 어떤 이에게는 매우 쉬운 일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중하셨습니다. 지금까지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나아가셨습니다. 이제와 그 아이로 인해 잘못된 걸음을 내딛지 마십시오. 그 아이에게도, 잔인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간곡히 청하겠습니다. 그 아이에게, 헛된 희망을, 주지 마시옵소서."

어느새 세자의 표정은 무섭게 굳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너머 벽 뒤편에, 입을 막은 체 서 있던 연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람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내 알고 있다 하지 않았느냐?"

세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묘한 기대감이 들었다.

그 어떤 말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을 해주기를.

그 어떤 잔인한 결말이 있을지라도, 모래알 같은 희망이 되는 말을 해주기를.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연심이 아니다. 그저 측은하여 살핀 것이다. 일국의 세자인 내가, 천인인지 중인 인지도 모를 아이에게 연심을 줄 만큼 사리분별이 없다 여기느냐? 그 정도 사리를 살필 줄 아니, 너무 심려 말거라."

세자의 말이 가슴에 쐐기처럼 박혀왔다.

두근거리던 심장은 빠른 속도로 싸늘하게 식어갔다.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이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세자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싸늘해진 가슴속에서부터 움트는 눈물은, 그런 이해하고는 무관하게 눈을 통해 흘러나왔다.

"다행입니다."

짤막한 한숨과 함께 들려오는 혜령옹주의 대답을 끝으로, 연희는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당장은 차마 세자를 마주 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아무도, 아무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연희가 자리를 비우고, 혜령옹주도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할 때, 세자가 그녀에게 말했다.

"행여나..."

혜령옹주가 발걸음을 멈추고, 세자를 돌아보았다.

"연희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혜령옹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이를... 걱정하시는 것이옵니까?"

"걱정하는 것이다."

너무도 단호한 대답에 혜령옹주는 도리어 어리둥절 해졌다.

"연심이 아니라면, 걱정도 할 수 없는 것이냐? 네가 나를 걱정하는 것이, 연심 때문이었더냐?"

세자의 말에 혜령옹주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저하..."

"그게 아니라면!"

세자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걱정조차 하지 말란 소리는 하지 말거라. 걱정할 것이다. 걱정되면 살필 것이고, 걱정되면 찾아가 물을 것이다. 꼭 연심이 있어야만 그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혜령옹주는 말없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체념한 듯 공손히 인사를 한 뒤,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혜령옹주가 떠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자는, 다시 천천히 수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 연희는 없었다.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나 조금씩 몸을 움직여 보고 있던 수현은, 세자가 안으로 들어서자 황급히 옷을 갖추어 입으며 공손히 인사를 하였다.

세자는 응당 그를 만나러 왔음에도,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연희를 찾으시는 것이옵니까?"

수현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세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아하하, 자네도 참... 자네를 보러 왔지."

수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저를 보러 왔다가, 겸사겸사 연희도 볼 수 있는 것이지요. 헌데, 좀 전까지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자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괜찮네, 괜찮아. 자네를 보러 온 것일 뿐이야. 자자, 어서 앉게. 아직 무리하기엔 이르네."

세자가 수현을 앉히며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몸은 좀 많이 나아졌는가?"

"예, 이제 다시 저하의 곁을 호위해도 될 듯합니다."

"걱정하지 말게. 지금은 내 병판대감에게 부탁해, 특별히 금위영에 호위를 받고 있네."

세자의 말에 수현이 놀란 표정이 되어 물었다.

"금위영이라뇨? 도총부나 어영위가 있사온데, 어찌..."

"아니다. 오히려 병판의 사람에게 호위를 받으니, 내게 문제가 생기면 곤란할 터, 오히려 적에게 호위를 맡겼기에, 더 안전한 것이다."

수현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가끔 저하를 가늠키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것은 생각만 하지, 대게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세자가 방긋이 웃어 보였다.

"나도 가끔 나를 모를 때가 있다. 그래도 겁은 나더구나. 내 예상을 벗어나 갑자기 등 뒤에 칼을 꼽을까 조마조마 하지. 그런데..."

세자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희가 오지 않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종종 이리 자리를 오래 비우느냐? 내 오면 단단히 일러야 겠구나."

세자의 말에 수현이 풋하고 웃음 지었다.

"보고 싶으십니까?"

난데없는 수현의 물음에 세자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를... 나를 뭘로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이냐? 보고 싶냐니?"

세자가 격앙된 표정으로 엄하게 물으니, 수현이 정색을 하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소신이 큰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수현을 보며 세자는 한숨과 함께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실은 보고 싶다. 어찌 안 오는 것이냐?"

수현이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런 수현을 보며 세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뭐 다 알고 있구만, 놀란 척을 하느냐?"

"그래도 그렇게 인정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모를 일이구나."

둘은 그렇게 잠시 말없이 앉아 있었다. 순간 세자가 뽀루퉁하게 툴툴 거리는 투로 이야기했다.

"정말 한번 혼쭐을 내줘야겠다. 간병을 하라 했더니, 어디서 잔꾀를 부리고 있는 게야? 이러니 손이 곱지. 양인이어서 손이 고운 게 아니라, 게을러서 손이 고운 게야."

세자의 투덜거림에 수현이 피식 웃음 지었다.

"그러면서 은근히 손이 곱다 칭찬하십니다."

세자가 정색을 하며 수현을 쏘아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게야?"

세자가 그렇게 수현에게 자신의 감정이 틀통나버려 민망해하고 있을 때, 정작 당사자인 연희는 인적이 드문 곳에 몸을 숨긴 체 흐느껴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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