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2
저녁노을이 질 무렵, 앞서 가던 표국 일행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쪽으로 다가가니 표국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거리며 들려오고 있었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니, 대장이란 사람과 몇몇 표국 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너머로 대략 십여 장 앞으로 일련의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상의가 거의 드러나는 독특한 복색에 큼지막한 대도를 들고,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로 서 있으며, 그 수가 꽤 많은 것이 남은 표국 무사로는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다.
"아이쿠야.... 녹림입니다. 어, 어서 도망가시지요."
뒤따라온 유림이 건너편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하며 말했다.
"저들이 그리 무서운가?"
"저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닙니다. 정파무림, 사파 무림과 비견되는 그런 자들입니다."
라마가 풍진표국 사람들을 살펴보니, 남은 무사는 고작해야 10명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단순 짐꾼이거나 수행을 보조하는 인원이었고, 그들까지 모두 합해봐야 20여 명 수준이었다.
반면 지금 저기서 길을 막고 있는 자들은, 족히 봐도 50명은 넘어 보였다.
하나같이 강건해 보이는 사내들로, 당장이라도 저 큼지막한 대도를 들고 달려와 모두 죽일 것만 같았다.
"근데 왜 덤비지는 않고 저러고 있는 거지?"
라마가 궁금한 듯 유림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풍진표국의 대장이 라마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짐을 포기하고 도망치기를 기다리는 것이오. 싸우면 자신들도 피해를 보니, 위세를 보고 우리가 짐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요."
라마는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저 녹림이란 자들이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어쩌실 요량이요?"
라마가 묻는 말에 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니? 보면 모르시오?"
대장이 고개를 돌려 행렬을 바라보자, 라마 역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남은 인원은 고작 4명. 이미 녹림의 위세를 보고 다들 도망친 뒤였다.
풍진표국의 대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걸음 나서 소리쳤다.
"짐은 포기하겠소. 숨진 형제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대장의 말에 녹림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체격부터 인상까지 딱 봐도 대장 느낌 나는 그런 자였다.
"시신을 데리고 가는 것은 허락 하마. 허나, 이길로는 못 간다. 돌아가라."
"고맙소."
대장이 돌아서서 남은 4명의 무사들을 보며 말했다.
"시신을 실은 마차만 끌고 간다."
그의 말에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시신을 실은 두 개의 마차만을 끌고 방향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녹림의 사람들은 돌아가는 풍진표국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고, 라마는 풍진표국 사람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거요?"
라마가 궁금한 듯 묻자, 대장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어쩌겠소? 그냥 개죽음당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하긴 그렇긴 한데...
라마는 뭔가 좀 아쉬움이 남았다. 적지 않은 사람이 죽어가며 짐을 옮긴 모양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게 되다니...
그렇게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무사가 대장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헌데... 짐 안에 충분한 것이 있는 것인가?"
나이가 꽤 젊고 준수해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수하 무관 치고는 언행이 조금 달라 보였다.
"적당히 넣어두었습니다. 염려치 마시지요."
오히려 대장이란 자가 존칭을 쓰고 있었고, 그는 대답 이후에 라마의 눈치를 살폈다.
라마는 이내 상황이 이해되었다.
지금 이들이 호송하는 것은 짐이 아닌 사람이었고, 아마도 그 사람은 저 무관 복장의 젊은 청년 이리라.
"무공이 제법 출중한 것 같은데... 어떠하시오? 우리와 이 자리에서 계약을 하는 것이."
갑작스러운 대장의 제안에 라마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계약? 무슨 계약?"
"뭐, 이미 눈치는 챈 것 같으니 굳이 숨기지 않으리다. 내 곁에 계신 이분은 우리가 호송 중인 분이오. 아까 녹림채가 가져간 짐은 눈속임을 위한 것일 뿐."
라마가 청년을 흘낏 바라보자, 청년은 모르는 척 애써 눈길을 피했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소. 그때까지만 우리의 호송을 도와주시오. 보다시피 이제 무사가 얼마 남지 않아, 위험에 대비할 여력이 없소. 도와주신다면, 사례는 두둑이 하겠소."
"이대로 가기만 하면 크게 염려할 것 없을 것 같은데... 굳이 큰돈 써가며 나를 고용할 필요가 있나?"
라마가 되묻는 말에 대장은 피식 웃어 보였다.
"본디 짐이란 것이 나르면 그만. 표국이 호송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오. 그런 의미에서 제안하는 것이오."
"뭐... 어차피 나도 가는 길이니. 좋수다."
대장이 선뜻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고운월이라 하오."
"... 라마...요."
라마가 머쓱하게 인사하며 악수를 하자, 고운월이 살짝 웃어 보였다.
"잠깐 느끼기에도 내력이 상당하시구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은 듯 하니, 잘 부탁하겠소."
칭찬 아닌 칭찬에 라마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그럽시다."
괜스레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본다.
그렇게 같이 걷기 시작하여, 늦은 저녁에서야 도착한 이름 모를 객점에 일행은 자리를 잡았다.
아까 보았던 미청년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짐을 풀고 식사를 위해 다시 한자리에 모인 일행 중 고운월은 라마의 옆자리에 앉았고, 그는 라마를 보며 대뜸 말을 건네 왔다.
"내일이면 익주의 경계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익주의 낙현이니 그리 멀지 않소."
반대쪽에 앉아 있던 송이개가 고개를 불쑥 내밀어 고운월을 바라보며 물었다.
"낙현이면... 관청으로 가시는 게요?"
"그렇소."
그렇게 대답하는 사이, 아까 보았던 미청년이 돌아왔다.
그가 나타나자 고운월을 비롯한 표국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마와 송이개, 유림은 그 분위기에 놀라 쭈뼛거리며 따라 일어났다.
그런 그들을 보며 고운월이 미청년을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가 낙현의 관청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한 조원영 왕자십니다."
고운월의 소개에 조원영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신세를 지게 된 조원영이라 합니다."
라마는 왕자라는 말에 놀라 황급하게 마주 인사하였고, 그런 라마와 일행을 보며 고운월이 이어 말했다.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이처럼 분장하였으니, 평소에는 격의 없이 대하여 주셔야 합니다."
"아... 예...."
뭔가 찜찜한 게, 괜한 일을 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원영이 먼저 자리에 앉자,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오늘 저녁 식사는, 꽤나 소화가 안 되는 자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식사가 나오고 각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여념이 없는 와중에, 유림이 먹다 말고 표표히 일어나 조원영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조원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유림을 바라보니, 유림이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혹... 조원영 왕자시라면... 조수강 왕야의... 자제... 분이신지?"
유림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조원영이 웃어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눈빛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유림이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껄껄 거리며 웃었다.
"아하하, 그거야... 어지간한 무림인이라면 다들 아는 분 아니겠습니까? 하하,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조왕야의 무공이 심오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라마는 유림이 눈에 뻔히 보이는 아부를 하고 있으니,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림의 아부는 계속되었다.
"미천하오나, 소인은 서유림이라 하옵니다. 비록 지금이야 이렇게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방랑자의 길을 걷고 있으나, 한때는 저도 무림맹에 속해 있었습죠. 그때 조왕야의 명성을 익히 들었사옵니다."
유림의 말에 조원영도 반색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무림맹에 계셨습니까?"
"예, 뭐 그리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나, 그곳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 입죠."
"저도 오래전 일이기는 하나, 아버지를 따라 무림맹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 보았던 장하기 맹주의 위엄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유림은 무림맹의 맹주 이름이 나오자,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아~ 저희 맹주님이요? 아하하... 그러셨구나. 그렇죠. 참 위엄이 어린 분이시지요."
그러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송이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보아하니, 끄트머리 말단 단원이었을 것 같은데.... 장하기 맹주의 모습을 본 적이나 있긴 한 거야?"
송이개의 퉁명스러운 말에, 유림은 더욱 난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하하, 송공도 참... 아, 보기엔 저래 보이셔도, 송공 역시 무림맹에 속한 개방의 사람이십니다."
난데없는 유림의 소개에, 조원영은 "아~"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습니다. 걸인 분들께서 모여 계신 곳이라고."
"예예, 그럽죠. 가시는 동안 심심하지 않으시게, 제가 무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라마는 문득 궁금함이 생겨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심히 조원영을 살피다가,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뭘까, 이 찜찜함은... 서서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대충 먹었으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얼마 후 라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송이개의 팔을 잡아당기자 송이개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자 라마는 눈치를 주며 송이개의 팔을 더 잡아당겼고, 송이개는 아쉬운 듯 식사를 마치고 라마를 따라나섰다.
라마는 잡아끌듯이 송이개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송이개를 보며 물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라마의 물음에 송이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뭐가...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라마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송이개에게 물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 건지... 그... 왕자라는 사람, 원래 왕족 사람들 말투가 그럽니까?"
라마의 물음에 송이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곰곰이 생각하던 송이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황족 사람이라고 하기엔... 보통 황족 사람들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죠."
라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세계도 그렇군요. 그렇다면, 뭔가 신분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유림이 들어섰다.
태연히 들어선 유림이 빙그레 웃어 보이자, 라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서 발바닥이라도 닦아주지, 여긴 뭣하러 기어 들어왔나?"
비아냥 거리듯 묻는 라마의 물음에 유림이 헤헤 거리며 대답했다.
"소협도 참... 황족이 어디 쉬이 볼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있을 때 다 길을 터 놔야, 또 앞으로 삶에 살이 되고 뼈가 되지요."
"아, 그러셔. 그러니까 얼른 가서 더 잘 보여야지."
그러자 유림은 태연히 한쪽에 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근데 그것이... 안타깝게도, 제가 조원영 왕자를 잘 알거든요."
"뭐?"
유림이 과장되게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조원영 왕자가 저를 알지는 못하나, 아주 가까이서 몇 번 뵌 적이 있죠."
송이개가 그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웃기고 있네. 왜? 그 잘난 무림맹에 있을 때 봤어?"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 조왕야의 행차 때 곁을 지키던 조원영 왕자를 보았죠."
"왜, 가서 그것도 얼른 얘기하지."
"그랬다가는 제 목이 달아날 겁니다."
뜻밖의 대답에 라마와 송이개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유림이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
"참 답답들 하시네. 그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저 사람. 조원영 왕자가 아니라고."
"엥?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조원영 왕자가 아니라니까. 내가 조원영 왕자를 곁에서 본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라서, 얼굴 생김새며 세세한 모습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자기 아비를 닮아 풍채가 크고 호기 당당한 모습이었소. 딱 보면 모르시오? 벌써 말투부터가 황족이나 왕자 느낌이 안나잖아."
라마와 송이개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금 전 자신들이 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럼 누군데?"
라마가 묻는 말에 유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낸들 아나? 그걸 좀 알아볼까 하고 가서 말을 좀 걸어 봤는데... 좀처럼 짐작되는 바가 없네. 왜? 무슨 이유로? 조원영 왕자의 행세를 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라마는 침상에 가 드러누우며 말했다.
"아, 몰라. 데려다주고 돈이나 받읍시다."
이래저래 피곤한 하루였을까? 라마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쪽으로 다가가니 표국 사람들이 술렁이는 소리가 귓가에 웅웅 거리며 들려오고 있었다.
좀 더 앞으로 나아가니, 대장이란 사람과 몇몇 표국 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고, 그들 너머로 대략 십여 장 앞으로 일련의 사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들은 상의가 거의 드러나는 독특한 복색에 큼지막한 대도를 들고, 하나같이 험상궂은 얼굴로 서 있으며, 그 수가 꽤 많은 것이 남은 표국 무사로는 감당하기 버거워 보였다.
"아이쿠야.... 녹림입니다. 어, 어서 도망가시지요."
뒤따라온 유림이 건너편 사람들을 보고 기겁을 하며 말했다.
"저들이 그리 무서운가?"
"저들은 단순한 강도가 아닙니다. 정파무림, 사파 무림과 비견되는 그런 자들입니다."
라마가 풍진표국 사람들을 살펴보니, 남은 무사는 고작해야 10명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단순 짐꾼이거나 수행을 보조하는 인원이었고, 그들까지 모두 합해봐야 20여 명 수준이었다.
반면 지금 저기서 길을 막고 있는 자들은, 족히 봐도 50명은 넘어 보였다.
하나같이 강건해 보이는 사내들로, 당장이라도 저 큼지막한 대도를 들고 달려와 모두 죽일 것만 같았다.
"근데 왜 덤비지는 않고 저러고 있는 거지?"
라마가 궁금한 듯 유림에게 묻는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풍진표국의 대장이 라마를 보며 말했다.
"우리가 짐을 포기하고 도망치기를 기다리는 것이오. 싸우면 자신들도 피해를 보니, 위세를 보고 우리가 짐을 포기하게 만드는 게요."
라마는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저 녹림이란 자들이 생각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다.
"어쩌실 요량이요?"
라마가 묻는 말에 대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쩌다니? 보면 모르시오?"
대장이 고개를 돌려 행렬을 바라보자, 라마 역시 고개를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남은 인원은 고작 4명. 이미 녹림의 위세를 보고 다들 도망친 뒤였다.
풍진표국의 대장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걸음 나서 소리쳤다.
"짐은 포기하겠소. 숨진 형제들의 시신을 운반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오."
대장의 말에 녹림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체격부터 인상까지 딱 봐도 대장 느낌 나는 그런 자였다.
"시신을 데리고 가는 것은 허락 하마. 허나, 이길로는 못 간다. 돌아가라."
"고맙소."
대장이 돌아서서 남은 4명의 무사들을 보며 말했다.
"시신을 실은 마차만 끌고 간다."
그의 말에 무사들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시신을 실은 두 개의 마차만을 끌고 방향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녹림의 사람들은 돌아가는 풍진표국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서 있었고, 라마는 풍진표국 사람들을 따라 걷고 있었다.
"이렇게 쉽게 포기해도 되는 거요?"
라마가 궁금한 듯 묻자, 대장이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어쩌겠소? 그냥 개죽음당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하긴 그렇긴 한데...
라마는 뭔가 좀 아쉬움이 남았다. 적지 않은 사람이 죽어가며 짐을 옮긴 모양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하게 되다니...
그렇게 길을 가고 있을 때, 한 무사가 대장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헌데... 짐 안에 충분한 것이 있는 것인가?"
나이가 꽤 젊고 준수해 보이는 청년이었는데, 수하 무관 치고는 언행이 조금 달라 보였다.
"적당히 넣어두었습니다. 염려치 마시지요."
오히려 대장이란 자가 존칭을 쓰고 있었고, 그는 대답 이후에 라마의 눈치를 살폈다.
라마는 이내 상황이 이해되었다.
지금 이들이 호송하는 것은 짐이 아닌 사람이었고, 아마도 그 사람은 저 무관 복장의 젊은 청년 이리라.
"무공이 제법 출중한 것 같은데... 어떠하시오? 우리와 이 자리에서 계약을 하는 것이."
갑작스러운 대장의 제안에 라마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계약? 무슨 계약?"
"뭐, 이미 눈치는 챈 것 같으니 굳이 숨기지 않으리다. 내 곁에 계신 이분은 우리가 호송 중인 분이오. 아까 녹림채가 가져간 짐은 눈속임을 위한 것일 뿐."
라마가 청년을 흘낏 바라보자, 청년은 모르는 척 애써 눈길을 피했다.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소. 그때까지만 우리의 호송을 도와주시오. 보다시피 이제 무사가 얼마 남지 않아, 위험에 대비할 여력이 없소. 도와주신다면, 사례는 두둑이 하겠소."
"이대로 가기만 하면 크게 염려할 것 없을 것 같은데... 굳이 큰돈 써가며 나를 고용할 필요가 있나?"
라마가 되묻는 말에 대장은 피식 웃어 보였다.
"본디 짐이란 것이 나르면 그만. 표국이 호송하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오. 그런 의미에서 제안하는 것이오."
"뭐... 어차피 나도 가는 길이니. 좋수다."
대장이 선뜻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고운월이라 하오."
"... 라마...요."
라마가 머쓱하게 인사하며 악수를 하자, 고운월이 살짝 웃어 보였다.
"잠깐 느끼기에도 내력이 상당하시구만. 내가 사람을 잘못 보진 않은 듯 하니, 잘 부탁하겠소."
칭찬 아닌 칭찬에 라마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 그럽시다."
괜스레 웃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본다.
그렇게 같이 걷기 시작하여, 늦은 저녁에서야 도착한 이름 모를 객점에 일행은 자리를 잡았다.
아까 보았던 미청년만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짐을 풀고 식사를 위해 다시 한자리에 모인 일행 중 고운월은 라마의 옆자리에 앉았고, 그는 라마를 보며 대뜸 말을 건네 왔다.
"내일이면 익주의 경계로 들어설 수 있을 것이오. 우리가 향하는 곳은 익주의 낙현이니 그리 멀지 않소."
반대쪽에 앉아 있던 송이개가 고개를 불쑥 내밀어 고운월을 바라보며 물었다.
"낙현이면... 관청으로 가시는 게요?"
"그렇소."
그렇게 대답하는 사이, 아까 보았던 미청년이 돌아왔다.
그가 나타나자 고운월을 비롯한 표국 사람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라마와 송이개, 유림은 그 분위기에 놀라 쭈뼛거리며 따라 일어났다.
그런 그들을 보며 고운월이 미청년을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가 낙현의 관청까지 모셔다 드리기로 한 조원영 왕자십니다."
고운월의 소개에 조원영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며 인사했다.
"신세를 지게 된 조원영이라 합니다."
라마는 왕자라는 말에 놀라 황급하게 마주 인사하였고, 그런 라마와 일행을 보며 고운월이 이어 말했다.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이처럼 분장하였으니, 평소에는 격의 없이 대하여 주셔야 합니다."
"아... 예...."
뭔가 찜찜한 게, 괜한 일을 맡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원영이 먼저 자리에 앉자, 모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오늘 저녁 식사는, 꽤나 소화가 안 되는 자리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식사가 나오고 각자 허기진 배를 채우기 여념이 없는 와중에, 유림이 먹다 말고 표표히 일어나 조원영의 옆자리로 다가가 앉았다.
조원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유림을 바라보니, 유림이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혹... 조원영 왕자시라면... 조수강 왕야의... 자제... 분이신지?"
유림이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조원영이 웃어 보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눈빛은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예, 맞습니다. 어찌 아셨습니까?"
유림이 아주 반가운 표정으로 껄껄 거리며 웃었다.
"아하하, 그거야... 어지간한 무림인이라면 다들 아는 분 아니겠습니까? 하하, 황족임에도 불구하고 조왕야의 무공이 심오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라마는 유림이 눈에 뻔히 보이는 아부를 하고 있으니,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림의 아부는 계속되었다.
"미천하오나, 소인은 서유림이라 하옵니다. 비록 지금이야 이렇게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방랑자의 길을 걷고 있으나, 한때는 저도 무림맹에 속해 있었습죠. 그때 조왕야의 명성을 익히 들었사옵니다."
유림의 말에 조원영도 반색하는 표정이 되었다.
"아~ 무림맹에 계셨습니까?"
"예, 뭐 그리 오래 있었던 것은 아니나, 그곳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 입죠."
"저도 오래전 일이기는 하나, 아버지를 따라 무림맹을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에 보았던 장하기 맹주의 위엄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유림은 무림맹의 맹주 이름이 나오자, 잠깐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아~ 저희 맹주님이요? 아하하... 그러셨구나. 그렇죠. 참 위엄이 어린 분이시지요."
그러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송이개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보아하니, 끄트머리 말단 단원이었을 것 같은데.... 장하기 맹주의 모습을 본 적이나 있긴 한 거야?"
송이개의 퉁명스러운 말에, 유림은 더욱 난처한 표정이 되어 말했다.
"아하하, 송공도 참... 아, 보기엔 저래 보이셔도, 송공 역시 무림맹에 속한 개방의 사람이십니다."
난데없는 유림의 소개에, 조원영은 "아~"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고 있습니다. 걸인 분들께서 모여 계신 곳이라고."
"예예, 그럽죠. 가시는 동안 심심하지 않으시게, 제가 무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라마는 문득 궁금함이 생겨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심히 조원영을 살피다가, 문득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피해버렸다.
뭘까, 이 찜찜함은... 서서히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대충 먹었으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얼마 후 라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송이개의 팔을 잡아당기자 송이개가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자 라마는 눈치를 주며 송이개의 팔을 더 잡아당겼고, 송이개는 아쉬운 듯 식사를 마치고 라마를 따라나섰다.
라마는 잡아끌듯이 송이개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송이개를 보며 물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라마의 물음에 송이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뭐가...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라마는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송이개에게 물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런 건지... 그... 왕자라는 사람, 원래 왕족 사람들 말투가 그럽니까?"
라마의 물음에 송이개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곰곰이 생각하던 송이개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황족 사람이라고 하기엔... 보통 황족 사람들은 거만하기 이를 데 없죠."
라마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세계도 그렇군요. 그렇다면, 뭔가 신분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방문이 열리며 유림이 들어섰다.
태연히 들어선 유림이 빙그레 웃어 보이자, 라마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가서 발바닥이라도 닦아주지, 여긴 뭣하러 기어 들어왔나?"
비아냥 거리듯 묻는 라마의 물음에 유림이 헤헤 거리며 대답했다.
"소협도 참... 황족이 어디 쉬이 볼 수 있는 사람입니까? 있을 때 다 길을 터 놔야, 또 앞으로 삶에 살이 되고 뼈가 되지요."
"아, 그러셔. 그러니까 얼른 가서 더 잘 보여야지."
그러자 유림은 태연히 한쪽에 가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근데 그것이... 안타깝게도, 제가 조원영 왕자를 잘 알거든요."
"뭐?"
유림이 과장되게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조원영 왕자가 저를 알지는 못하나, 아주 가까이서 몇 번 뵌 적이 있죠."
송이개가 그 말을 듣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웃기고 있네. 왜? 그 잘난 무림맹에 있을 때 봤어?"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고. 조왕야의 행차 때 곁을 지키던 조원영 왕자를 보았죠."
"왜, 가서 그것도 얼른 얘기하지."
"그랬다가는 제 목이 달아날 겁니다."
뜻밖의 대답에 라마와 송이개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졌다.
유림이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재밌다는 듯이 웃으며 이어 말했다.
"참 답답들 하시네. 그만큼 얘기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저 사람. 조원영 왕자가 아니라고."
"엥?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긴. 조원영 왕자가 아니라니까. 내가 조원영 왕자를 곁에서 본 게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라서, 얼굴 생김새며 세세한 모습까지 정확하게 기억하지. 자기 아비를 닮아 풍채가 크고 호기 당당한 모습이었소. 딱 보면 모르시오? 벌써 말투부터가 황족이나 왕자 느낌이 안나잖아."
라마와 송이개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방금 전 자신들이 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럼 누군데?"
라마가 묻는 말에 유림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낸들 아나? 그걸 좀 알아볼까 하고 가서 말을 좀 걸어 봤는데... 좀처럼 짐작되는 바가 없네. 왜? 무슨 이유로? 조원영 왕자의 행세를 하는 걸까?"
잠시 생각하던 라마는 침상에 가 드러누우며 말했다.
"아, 몰라. 데려다주고 돈이나 받읍시다."
이래저래 피곤한 하루였을까? 라마는 금세 잠이 들어버렸다.
아직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